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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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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화차가 동원된 화력전 ‘만령전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7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에서 이시애의 반란군과 관군 사이에서 벌어진 1467년의 ‘만령전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령전투 당시 반군의 주력이었던 익속군은 처음엔 관군을 압도했다고 하지요. 1467년 5월, 길주에서 시작된 반란은 강원도 철원까지 진출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승기가 반군 쪽으로 기울던 차에 관군은 화차를 등장시켜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결국 이시애는 반란 3달 만에 관군에게 체포되어 8월 12일 효수되었지요. 2008년 영화 <신기전>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한 신기전은 1448년(세종 30년) 고려말 최무선이 만든 로켓형 화기인 ‘주화(走火)’를 개량한 것으로 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 등의 여러 종류가 있었지요. 신기전은 자체 추진력으로 날아가므로 발사장치가 없어도 되지만 문종이 화차를 개발함으로써 발사각도와 방향을 정확히 잡게 되고 한 번에 많은 신기전을 발사할 수 있게 되어 신기전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 화차가 바로 이시애난을 평정할 수 있었던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렇게 큰 위세를 떨

조선시대, 6~7살 넘은 아이 아버지가 양육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7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아이가 학업에 소홀하여 나무랐는데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 나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동문 밖에 나갔다. 곧바로 종을 보내 불러오게 했는데 돌아온 뒤 사립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들어오지 않았다. (중략) 묵재가 그 불손함을 꾸짖으며 친히 데리고 들어오면서 그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다섯 번 때렸다. 방에 들어오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에 손자가 엎드려 울었다.”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문건(李文楗, 1494∼1547)이 쓴 《양아록(養兒錄)》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문건은 손자를 가르치며,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렸습니다. 물론 지나친 감정의 체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때린 뒤 손자가 한참을 엎드려 울자 자신도 울고 싶은 마음뿐이라 고백합니다. 이문건은 장조카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귀양살이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손자를 가르침에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고 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문건이 쓴 또 다른 책 《묵재일기(默齋日記)》에 보면 손자가 6살 이전에는 어머니가 사는 안방에서 지냈지만 6살이 되면 자신의 거처에 오게 하여 항상 돌보며 가르쳤고, 이따금 밖에

미국을 떠돌다 귀국한 고종과 명성황후 어새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7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왕실에서 쓰던 도장으로는 국새와 어보가 있습니다. ‘국새는(國璽)’는 외교문서를 비롯한 각종 공공문서에 공적 목적으로 쓰였지요. 이와는 달리 ‘어보(御寶)’는 주로 존호(尊號,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과 시호(諡號,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품계를 높여주던 이름)를 올리는 등 궁중 의식을 치를 때 의례용으로 쓰던 도장입니다. 그런데 국새는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없어졌지만 어보는 종묘에 보관했기에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보와 국새의 모양과 크기, 재료는 거의 비슷합니다. 어보의 높이는 대략 10센티미터, 무게는 2~7킬로그램 정도며, 재료로는 금ㆍ은ㆍ옥 등이 쓰입니다. 대부분 사각 몸체에 거북이나 용 모양의 손잡이에 끈이 달린 모습인데 거북 모양의 손잡이는 임금을 상징하고, 황제의 상징으로는 용이 쓰였습니다. 어보에 새긴 글자는 임금ㆍ왕비ㆍ세자ㆍ세자빈 등의 시호(추증한 이름)나 존호(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 휘호 등을 새겼는데 적게는 4자에서 많게는 100자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조선 왕실의 어보는

《삼국사기》 기록에 있는 부여 ‘궁남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7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충청남도 부여에 가면 사적 제135호 ‘부여 궁남지(宮南池)’가 있습니다. 백제의 별궁 연못이며,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궁남지라 부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0여 리나 되는 긴 물길을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길과 물가ㆍ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못의 가운데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지요.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입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하는데,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리지요.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

임금의 종친도 두들겨 팼던 무뢰배 별감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7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종실(宗室) 원흥수(原興守) 이후(李煦)가 별감(別監) 김세명(金世鳴)을 만났는데, 김세명이 이후가 답례 절을 하지 않는다며 욕을 하므로, 후가 화를 내며 그의 입에다 오물을 집어넣고서 마구 때렸습니다. 그 뒤 김세명이 패거리 20여 명을 데리고 이후의 집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 이후를 끌어내다 묶어 놓고 마구 때렸습니다. 이후의 형 이경(李炅)이 격고(擊鼓, 임금이 나들이할 때, 억울한 일을 상소하기 위하여 북을 치는 일)하고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별감 등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몰아서 쫓아내고 뺨을 때려 피가 났으며, 사모(紗帽)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습니다.” 위 내용은 《숙종실록》 38년(1712) 10월 20일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김세명은 액정서별감(掖庭署別監) 곧 궁궐 안에서 왕실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궐내 각 문의 문단속, 궐내 각종 행사 준비, 시설물관리, 청소ㆍ정돈 따위의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고, 이후는 임금의 친족 곧 종친입니다. 액정서별감이 감히 종친을 두드려 팬 사건이지요. 물론 김세명은 처벌받았지만 이런 사건이 조선시대 내내 벌어집니다. 《순조실록》 16년 6월

저고리 위에 입었던 두루마기ㆍ도포ㆍ중치막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7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바지저고리 위에 겉옷을 걸치는데 이 겉옷으로 많이 입던 것에는 두루마기를 비롯하여, 도포와 중치막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기, 도포, 중치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고 직령교임식(直領交袵式) 곧 깃은 곧고 섶은 겹치도록 옷을 여미는 방식이며, 양옆 겨드랑이에 무(옷감을 덧대 것)를 달고, 길이는 발목에서 20~25cm 정도 올라옵니다. 또 도포는 깃이 곧고 소매폭이 넓으며, 옷 뒷면에 옷자락이 하나 더 붙어 있어 터진 곳을 가려주며, 품도 넓으며 길이도 길어서 발목까지 미칩니다. 여기에 도포는 특이하게 세조대(細絛帶)라 하여 가느다란 띠를 대는데 대의 끝에 술을 달고 품위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도포는 조선 중기 이후 많이 입었는데, 관리들도 관청에 나아갈 때를 빼고 사사로이 입는 겉옷이었습니다. 중치막은 도포와 달리 양옆 겨드랑이 부분의 무가 없이 트여 있어 활동하기 편할 뿐만 아니라 소매 너비가 넓어 널리 입었던 옷입니다. 그 밖에 유학자가 평상복으로 입던 겉옷으로 백세포(白細布, 빛깔이 하햔 모시)로 만들며 깃ㆍ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조선에 처음 들어온 축음기, ‘귀신소리 난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6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공연장도 많고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듣기도 하고, 더더구나 요즘은 USB 등을 써서 컴퓨터로 즐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전엔 음악 듣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오면 판소리가 유행하는데 이때는 명창을 불러와서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1860년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통해서 축음기라는 것이 들어와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축음기(蓄音機)는 말 그대로 “소리를 쌓아두는 기계”인데 이를 처음 본 조선 관리는 이 축음기를 “귀신소리 나는 기계”라고 했다 하지요. 명창 박춘재는 우리나라에 축음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축음기에 소리를 녹음해 즉석에서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미국의 빅터레코드사로 건너가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였지요. 그 뒤 1930년대 이후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자 덩달아 축음기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축음기는 회사원이 몇 달 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었기에 축음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 하였지요. 그래서 축음기를 가진 총각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유한 사람 외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