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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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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선 백의관음보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5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는 극락보전 후불 벽화인 보물 제1313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가 있습니다. 이 벽화는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 토벽에 황토색을 칠한 뒤 유려하고 간결한 맛으로 그린 관음보살벽화로, 1476년에 후불벽의 아미타삼존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입니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 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습니다.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지요.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있지요.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조선 사회의 변혁을 꿈꾼 ‘백탑파’ 지식인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5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는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있습니다. 높이 12m나 되는 이 탑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어서 백탑(白塔)이라는 별명이 생겼지요. 정조 때 이 탑골 주변의 지식인들이 모여 ‘백탑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당대 집권세력이던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인 박지원ㆍ홍대용과 비록 서얼이지만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 조선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정조(正祖) 시대인 1776~1800년간 힘을 얻었던 백탑파(白塔派) 선비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며 이들은 또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이기도 합니다.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깨닫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실학자(實學者)들이지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등이 그들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특히 백탑파는 당시 지배이념이면서 관념으로 흐르던 주자 학설을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

대한민국 어문정책의 큰 틀 만든 최현배 선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5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계계승승(繼繼承承)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 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위는 1894년 오늘(10월 19일) 태어난 외솔 최현배 선생이 펴낸 《우리말본》 머리말에서 있는 말입니다. 최현배 선생은 1929년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진력하였고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2년 선생은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펴냈는데 이 해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광복될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였지요.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

선조, 인원왕후 언문(한글)으로 교지를 쓰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4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후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심지어 공식 문서인 교지에도 언문을 썼습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諺書)로 방문(榜文,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백성을 알아듣도록 하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숙종의 제2계비로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5)는 1726년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임금을 즉위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원왕후는 아버지 김주신과 어머니

익살스럽고 앙증맞은 북청사자놀음 사자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4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이 지정한 무형문화재 가운데는 북한 쪽에서 전승되던 것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도 있지요. 이 사자놀음을 농경사회에서는 정월대보름에 놀았지만, 요즘은 때와 상관없이 놉니다. 또 이 놀음은 집안과 마을의 잡귀를 몰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 계통의 놀이였습니다. 특히 이 사자놀음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됨을 비손하면서, 춤과 노래로 흥과 신명을 돋우고 새로운 기분으로 활력을 되찾기 위한 민속놀이였지요. 사자놀음은 먼저 사람들이 모여 마당놀이를 하고 사당춤, 무동춤, 꼽추춤 따위로 한바탕 놀면 사자가 등장하여 사자춤을 춥니다. 사자가 한참을 놀다가 기진하여 쓰러지면 처음에는 스님을 불러 반야심경을 외우지만 사자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원을 불러 침을 놓는데 이에 사자가 기운 차리고 일어나서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 모두가 함께 춤을 추며, 사자를 놀리기도 합니다. 놀이에는 사자, 양반, 꺾쇠, 꼽추, 사령,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들이 나옵니다. 또 이 북청사자놀음에는 퉁소, 북, 징, 장구가 쓰이는데, 특히 다른 지역과 달

친일성향 연재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4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흔히 한국 신문만화의 처음을 말할 때 1909년 6월 2일 치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한 컷 만화를 꼽습니다. 다만, 이는 만화라기보다는 만평에 가까운데 어쨌든 한국 신문만화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꼽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한국 신문 첫 넷 컷 연재만화는 1924년 10월 13일 치부터 시작한 조선일보 '멍텅구리 헛물켜기'입니다. 한량과 기생의 연예행각을 그린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의 만화 '메기와 지그스'에서 착안한 명랑만화였는데 주인공 최멍텅과 친구 윤바람, 그리고 미모의 기생 신옥매 연애행각을 그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지요. 그림은 나중에 동양화의 대가로 꼽히는 노수현이 그렸고 줄거리는 '조선일보' 편집고문 이상협과 주필 안재홍이 꾸몄습니다. 이후 '멍텅구리 련애생활', '명텅구리 가뎡생활', '멍텅구리 세계일주' 등 시리즈로 연재되며 2년 5개월 동안 모두 501회나 연재되다 1927년 3월 11일 마지막 만화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문제연구소’의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를 보면 노수현은 일제강점기 동양화단의 손꼽히는

석가탑 사고 덕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4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66년 9월 6일 낮 2시쯤 경주 불국사 범영루 보수공사를 하고 있던 한 공사감독이 석가탑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여 경주시 교육청에 알렸습니다. 경주 교육청에서는 현장에 나가 확인한 결과 석가탑 2층 탑신의 서편이 사방 1자가량 떨어져 나가고 3층 탑신에 금이 생기는 등의 이상을 밝혔지만, 상처가 생긴 확실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였지요. 이후 불국사의 석가탑 훼손 사항을 조사한 문화재위원 황수영 동국대 교수는 현지조사를 마친 뒤 훼손의 원인은 사리장치를 노린 탑도둑의 짓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후 9월 30일에 열린 피해문화재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석가탑에 대한 해체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석가탑 복원을 위한 해체작업을 진행하던 중 10월 13일 낮 불의의 사고가 발생합니다. 2개의 받침 전주 가운데 하나가 부러져서 도르래로 2m 높이로 들어올린 2층 옥개석이 먼저 땅에 내려놓은 3층 탑신 위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 사고로 3층 탑신은 세 동강이 났고, 기단부 갑석 일부와 2층 옥개석의 받침 일부가 손바닥 크기로 조각났지요. 이렇게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 사고는 뜻밖에 큰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석가탑 2

대한제국 탄생, 황제 금색 오조룡보 입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4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함께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룡포를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위는 《고종실록》 고종 34년(1897년) 10월 12일 기록으로 123년 전 오늘 고종 임금은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며 임금은 황제라 부르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음은 물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습니다. 또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지요. 드디어 이날 조선은 중국 변방 나라가 아니라 황제국가로서 선포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고종황제는 변방 나라 제후가 입던 붉은빛 곤룡포를 벗고,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