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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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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집안에서 조선 으뜸 문인화가 된 심사정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7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겸재 그림은 말년에 더욱 능란해지고 신기해져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며, 세상에서는 겸현(謙玄)이라고 일컬지만, 그 아담한 정취는 현재에 미치지 못한다고도 한다.” 이 말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조순이 겸재 그림을 평한 <제겸재화첨>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조순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겸재 정선이 현재 심사정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군요. 요즘 사람들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웬만하면 알지만 현재(玄齋) 심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조선 후기 2백 년을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이 일컫는 3원3재(三園三齋,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뛰어난 화가입니다. 현재는 중국 남종문인화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토착화한 화가로 관념적 화풍으로 그윽한 멋과 조선 그림이 세계로 나가게 했다고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심사정은 할아버지 심익창이 영조 임금을 살해하려 한 무리의 배후라는 죄로 극형을 당한 뒤 몰락한 집안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도 그림에 시 한 수 붙여주

쌀 한 섬 값을 줘야 살 수 있었던 접부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7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느냐만 / 한밤중 서로 생각에 불이 나게 되면 / 무더운 여름 6월(음력)의 염천보다 더 뜨거우리라.” 위는 조선 중기 문인 임제(林悌)의 시입니다. 지금이야 선풍기나 에어컨으로 여름을 나지만 옛사람들은 부채가 여름을 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 부채는 모양 따라 방구부채(둥근부채)와 접부채로 나뉩니다. 먼저 방구부채는 부채살에 비단이나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의 부채로 단선 또는 원선이라고도 합니다. 방구부채에는 태극 무늬가 그려진 태극선, 오동잎처럼 생긴 오엽선, 왕의 행차에 쓰이던 파초선, 부채의 모양이 연잎과 같은 연엽선, 부채 바닥을 ‘X’ 모양으로 나누어 위와 아래는 붉은색, 왼쪽은 노란색, 오른쪽은 파란색을 칠하고 가운데는 태극무늬를 넣는 까치선, 공작선 등이 유명하지요. 또 접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접어서 쥐고 다니기 간편한 부채라는 뜻의 쥘부채, 거듭 접는다는 의미의 접첩선 또는 합죽선 등으로 불립니다. 접부채의 종류에는 꼭지를 스님의 머리처럼 동그랗게 만든 부채인 승두선(僧頭扇), 바깥쪽에 마디가

백사 이항복의 가르침, 나오고 물러감의 철학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7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在郊那似在家肥(재교나사재가비) 교외에 있는 것이 어찌 집에서 살찌는 것만 하겠냐고 人笑冥鴻作計非(인소명홍작계비) 사람들이 기러기 세운 계획 잘못됐다 비웃지만 莫把去留論得失(막파거류론득실) 가고 머무름으로 얻고 잃음을 말하지 말라 江南水闊網羅稀(강남수활망라희) 강남에는 물이 넓고 그물도 드물다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영정안(詠庭雁)’ 곧 “뜰의 기러기를 노래함”이라는 한사로, 벼슬에서 물러나 숨어 사는 것이 더 슬기롭다는 것을 기러기에 비유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사는 말합니다. 들판에 있는 것이 어찌 집에서 뒹굴뒹굴 살찌는 것만 하겠냐고 또 사람들이 기러기 세운 계획이 잘못됐다고 비웃지만, 나오고 물러감만을 가지고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지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강남에는 물이 넓어서 기러기가 살기 편하고 기러기를 잡는 그물도 많지 않다고 노래하지요. 여기서 그물은 벼슬길에 생기는 위험을 비유한 것입니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ㆍ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뒤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

곡식 말리고, 윷놀이ㆍ멍석말이도 하던 멍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7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저녁을 먹고 나서는 뜰이나 마루에 보리집자리나 멍석가튼 것을 펴고 왼가족이 다 나와 안습니다. 그리고 솔깡이나 겨릅가튼 것으로 우둥불을 놋습니다. 그리고는 내일은 무엇을 하느니 아무 논벼는 몃섬이 나느니 팟종자를 개량한다느니 목화바테 무명이 만히 피엇다느니 하야 한참동안 구수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는 부인네들은 혹 바느칠도하고 혹 삼도 삼고 혹 이야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잡지 《개벽 제4호》 1920년 9월 25일 자의 ‘농촌의 밤’이 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정겨운 시골 저녁 마당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지금은 전통한식점, 전통찻집 등에서 멋으로 둘둘 말아 한쪽 벽을 꾸미는 쓰임으로 전락했지만, 멍석은 예전 우리 겨레에게 친근한 삶의 도구였습니다. 멍석은 주로 짚으로 만들었으며 보통 3m × 1.8m 정도의 직사각형이지만 둥근 모양도 더러 있었고, 특히 맷돌질할 때 바닥에 깔아 쓰는 맷방석이라는 둥글고 작은 것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 김형수가 쓴 《월여농가(月餘農歌)》에는 ‘관도점’이라고 했으며 덕석, 덕서기, 턱성, 터서기 등으로 불렀습니다. 멍석은 고추, 깨, 콩, 벼 등 곡식을 널 때도 쓰고 잔치 때나 상을 당했을 때

오늘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숨을 거둔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7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라면서 평생을 호적 없이 지냈으며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라면서 집에서 손수 어린 딸을 공부시켰으며 총독부 청사를 마주 보기 싫어 북향집인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살았던 만해 한용운 선생. 광복되기 한해 전 오늘(6월 29일)은 선생이 그토록 원하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 날입니다. 선생은 3ㆍ1만세운동 선언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변절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분 가운데 하나지요.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 평의 나라 숲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으며,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이 나중에 변절하자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

오늘은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날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7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국방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만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도 행복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겨레의 지도자며, 나라의 큰 어른 김구 선생은 광복 4년 뒤인 1949년 오늘 (6월 26일) 1945년 11월 4일부터 1949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로 썼던 경교장(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29)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형을 면제받습니다. 그리곤 현역으로 복귀한 뒤 전역하고 군납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이는 대단한 배후를 짐작하게 하는 정황일 것입니다. 이렇기에 세간에서는 많은 배후설이 나돌았습니다. 특히 국내에 지지세력이 별로였던 이승만이 가장 큰 위협이라 여겨 선생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과 암살범 안두희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위한 감로도(甘露圖)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6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백성들이 불행하게도 거듭 흉년을 만난 데다가 돌림병까지 겹쳐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몹시 가난하여 잇따라 죽고 있으니, 이것만도 매우 참혹하고 불쌍하다. 그런데 또 제 때에 주검을 묻지 못하여 주검과 뼈가 도로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족히 화창한 기운을 침해하여 재앙을 초래할 만하다. 고요히 그 허물을 생각하면 내 실로 부끄럽고 마음 아프다." 《순조실록》 34년 1월 24일의 기록으로 흉년에 돌림병까지 겹쳐 많은 백성이 죽어가고 그 주검이 길거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처참한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는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게 되면 조정에서는 한성과 지방에 여제단(癘祭壇)을 설치해 돌림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달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을 피막에 수용, 격리하고, 돌림병이 지나간 마을을 불태우는 게 고작이었지요. 또 절에서는 비명횡사했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위해 수륙재(水陸齋)를 지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수륙재를 지낼 때는 ‘감로도(甘露圖)’라는 불화를 걸어놓는데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감로도를 보면 한가운데에 아귀(餓鬼)가 등장합니다. 아귀는 먹으려는 음식이 모두 불로 변해버리는 형벌을 받았기에 항상

영친왕비가 찼던 <쌍학문 자수 두루주머니>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6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순종비(純宗妃) 윤황후(尹皇后)가 영친왕비(英親王妃)에게 내려주었다는 <영친왕비 쌍학문 자수 두루주머니>가 있습니다. 주머니 가운데에는 두 마리 학이 정면을 향하여 날아들어 긴 목을 서로 부드럽게 감고 있는 모습을 수놓았지요. 학 주변은 구름무늬로 채웠는데, 안은 금사로 메우고 무늬 가장자리를 역시 금사로 마무리했습니다. 주둥이는 주름을 잡고, 좌우로 구멍을 뚫어 남색 끈을 꿰고 거기에 매듭을 장식하여 양쪽으로 늘어뜨려 붉은색 금사로 가락지를 끼워 마무리하였지요. 주머니는 자질구레한 물건이나 돈 따위를 넣고 허리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꾸미개로 옛날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지녔는데, 특히 대한제국 말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조끼를 뺀 다른 한복에는 물건을 넣을 만한 호주머니가 없어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주머니 가운데 아래는 둥글고 위는 모진 것인데 입구에 잔주름을 잡아 오므리는 주머니를 두루주머니라 합니다. 두루주머니 가운데서도 특히 오방색 곧 노랑, 파랑, 하양, 빨강, 검정의 5가지 빛깔을 써서 아름답게 만든 것이 오방낭자(五方囊子) 곧 오방 두루주머니입니다. 여기서 오방색이란 음과 양의 기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