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송곳으로 자기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화원 최북의 그림 가운데는 ‘풍설야귀인(風雪夜歸無人)’이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겨울밤, 귀가하는 나그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갑니다. 어쩌면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저 흉흉한 바람이 최북의 고달픈 인생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이 거칠게 보이는 것은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닌 손가락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인 ‘지두화(指頭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두화는 손가락만 쓰는 것이 아니라 손톱, 손바닥, 손등을 써서 그리는데 털로 만든 붓인 전통적인 모필화(毛筆畵)와는 달리 파격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독창법인 화풍입니다. 지두화는 원래 8세기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18세기 초에 청나라의 화가 고기패(高其佩)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화가로는 강세황(姜世晃)ㆍ허필(許珌)ㆍ심사정(沈師正) 같은 이가 있습니다. 원래 조선시대 묵화를 그리는 도구로는 붓을 썼는데 흔히 쓰던 붓으로는 염소털로 만드는 양호필(羊毫筆)이 있었지요. 그밖에 아기가 태어난 6달쯤 뒤에 처음 자르는 배냇머리로 만드는 ‘태모필(胎母筆)’이 있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유산청은 공주시와 함께 지난 6월 14일 충남 공주시 마곡사에서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의 국보 승격 지정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후기에 조성된 5층 석탑으로, ‘풍마동(風磨銅)’이라고도 불리는 길이 1.8m의 금동보탑을 옥개석 위에 올려 이른바 ‘탑 위에 탑’을 쌓은 매우 특수한 양식을 갖췄습니다. 특히, 금동보탑은 중국 원나라 등에서 유행했던 불탑 양식을 재현하고 있으며, 제작기법이 정교하고 기술적,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탑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당시 불교문화의 국제적인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값어치가 매우 크다는 평가입니다. ‘풍마동(風磨銅)’은 금보다 귀하고 바람에 마모되면 더욱 빛나는 까닭에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조선후기 문신 이의봉(1733~1801)이 1761년 북경의 궁궐을 방문한 뒤 쓴 《북원록(北轅錄, 북경 견문록)》에는 “십자각에는 금정(金頂, 금빛으로 빛나는 정수리)을 더해 놓아 빛이 유난히 찬란했는데, 이는 금이 아니요 이른바 풍마동(風磨銅)으로 외국의 소산이었다. 우리나라 마곡사(麻谷寺)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상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ㆍ《여계(女誡), 여자의 생활과 처신에 관한 계율》ㆍ《여측(女則)》과 같은 것을 한글로 뒤쳐 찍어서 나눠주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궁액(宮掖, 궁에 딸린 하인)으로부터 조정 벼슬아치의 집에 미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배우게 해서, 온 나라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게 하소서.” 우리는 흔히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조선시대 동안 홀대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의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1517년) 6월 27일 기록을 보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과 같이 일상에 절실한 것들은 한글로 뒤쳐 찍어서 나눠주어 온 백성이 공부하게 하자고 임금에 아룁니다. 이에 중종은 그렇게 하라고 윤허를 내릴 정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인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이 있을 정도였으며, 2010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펴낸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