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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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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사들, 《향약집성방》 등 많은 의서 펴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3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미리 했다. 하나는 주문을 외우면서 복숭아씨를 먹는 것이요, 하나는 헌 신 바닥을 불에 태워서 가루로 물에 섞어 마시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서 코 밑에 대고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부터 쓰던 방법으로서 효과가 가장 좋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어렵지도 않은 것이다.” 위는 오희문이 임진왜란 기간 9년 3개월 동안 쓴 일기 《쇄미록(䨏尾錄)》에 소개된 학질 떼는 방법입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때에는 가장 흔한 병이 학질, 이질, 감기라 했고, 지금으로 보면 그리 큰 병도 아닌 것에 백성들은 큰 고생을 했고, 죽어갔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학을 뗀다”라는 말이 있었을까요? 확실한 처방이 없었으니 저렇게 놀라게 하거나, 주문을 외우면서 복숭아씨를 먹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선시대는 의학지식이 발달하지 않아 이런 엉뚱한 민간요법을 쓰는 일이 많았는데, 반면에 조선의 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의 아픔 가운데

임명되는 사람의 이름이 없는 공명첩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3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호조가 아뢰기를, ‘해조가 노직 당상가선첩 각 2백 장과 추증당상가선실직첩 각 1백 50장을 만들어 보내어서 곡식 얻을 길을 넓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이것은 인가? 이 일에는 임진년 이래로 거짓되고 간사한 일이 없지 않았다. 비록 혹 내려보내더라도 상세하게 행회(行會)해서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위는 광해군일기[중초본] 114권, 광해 9년(1617) 4월 12일 기사로 여기나오는 ‘공명고신(空名告身, 공명첩)’은 나라의 재정이 부족할 때 관직명만 적고 이름은 비워둔 채 발행되는 조선후기 관직을 강매했던 가짜 임명장입니다.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내릴 때 주는 임명장을 교지(敎旨)라고 합니다. 교지는 관원을 임명할 때뿐만 아니라 임금이 시호(諡號),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할 때도 발급되었는데, 대한제국 때에는 황제가 내려주는 칙명(勅命)이라는 문서가 이를 대신하게 됩니다. 여기 국립고궁박물관에 교지도, 칙명도 아닌 교명(敎命)이란 이상한 문서도 있습니다. 더구나 임명되는 사람 이름은 비워두고, 날짜는 광무 6년 3월 아무개 날(날짜는 기록하지 않음)인

휴대했을 수도 있는 옛사람들의 부뚜막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3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에 있는 고분 3기 가운데 ‘궁녀의 묘’로 전해지는 네모난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쇠(철)로 만든 부뚜막이 있습니다. 크기는 길이 67.2cm, 높이 29.1cm, 너비 23cm입니다. 긴 네모꼴 한쪽에 아궁이와 솥 구멍을 마련하고, 반대쪽에 굴뚝을 붙인 모양이지요. 아궁이와 굴뚝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한 점이 특징으로 이마에는 불꽃모양 무늬가 있습니다. 휴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실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부뚜막’이란 것은 아궁이 위 가마솥이 놓인 언저리에 흙과 돌을 쌓아 편평하게 만들어, 솥에서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을 두거나 간단한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아궁이는 불을 때기 위하여 만든 구멍이기에 아궁이는 부뚜막 일부로 봐야 합니다. 보통 부뚜막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전남지역에서는 ‘부수막’, ‘부숭’, 제주도에서는 ‘솟덕’으로 부르며, ‘화덕(火德)’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는데 이는 중국어에서 빌려 온 말이며, ‘노지(爐址)’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부뚜막이나 아궁이는 유구나 유물로 확인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3세기 전반에

최현배 선생, 《중등조선말본》 처음 펴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3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34년 오늘(4월 5일)은 최현배 선생이 동광당서점을 통해서 《중등조선말본》 초판을 펴냈습니다. 《중등조선말본》은 본래 선생이 조선어학회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낸 책입니다. 당시 한반도 안에서는 물론이고 만주와 나라 밖에서도 널리 사용된 문법 교과서지요. 최현배 선생 개인으로는 이후 1937년에 펴낸 기념비적 책인 《우리말본》을 준비하는 가운데 나온 교과서라고 합니다. 《중등조선말본》은 ‘첫재 매[第一篇] 소리갈[音聲學], 둘재 매 씨갈[品詞論], 셋재 매 월갈[文章論]’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또 문법(文法)이란 한자말 대신 말본, 명사 대신 이름씨, 대명사 대신 대이름씨, 동사 대신 움즉씨, 형용사 대신 어떻씨, 부사(副詞) 대신 어찌씨, 조사(助詞) 대신 토씨라고 쓰는 등 토박이말로 10개 품사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중등조선말본》은 처음 펴낸 지 5달 만에 재판을 찍을 정도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으며, 1938년 6월에 제4판을 찍으면서 개정판을 발행하기에 이릅니다. 또 광복 뒤 1945년에 이 개정판의 지형을 써서 정음사에서 다시 펴내 해방 공간

‘너무’라는 말 아무렇게나 써서는 안 돼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3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아일보 1927년 8월 2일 치에는 <모녀 일시 익사(溺死), 너무 더워 목욕하다가 빠저, 딸 건지러다 희생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모녀는 동리 앞 저수지로 목욕하러 갔다가 물에 ᄲᅡ져 애처롭게도 두 모녀는 영원한 물나라로 가고 말앗다는데 이제 그 흉보를 들은 가족은 물론 린근 동리 사람들ᄭᅡ지 그를 불상히 녁안다더라”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의 제목처럼 ‘너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너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찌씨(부사)로 “정해진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 또는 보통을 훨씬 넘어서는 정도로”라고 풀이합니다. 오랜만에 여자 친구를 만난 남성이 “너무 예뻐졌네”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 여성은 부정적인 말 ‘너무’가 들어가니 지나치게 예뻐져서 안 좋다는 말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참 예뻐졌네”라고 말하면 좋을 것입니다. 방송이나 많은 이들이 쓰니까 써도 괜찮지 않으냐고 하지만 내가 앞장서서 쓰면 안 될 일입니다. 길에 가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욕을 하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을 봅니다. 자기들끼리야 그렇게 하는 게 소통이 잘 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멀

꽃 피는 봄, 진달래축제에 다녀올까?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3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궁화를 조선의 명화라 하지만은 사실로는 진달네(杜鵑花)가 조선의 대표명화와 가튼 감이 잇다. 진달네는 색깔이 아름답고 향취가 조흘뿐 안이라 전조선 어느 곳이던지 업는 곳이 업서서 여러 사람이 가장 넓히 알고 가장 애착심을 가지게 되는 까닭에 조선에 잇서서 꼿이라 하면 누구나 먼저 진달네를 생각하게 된다. 조선의 봄에 만일 진달네가 업다면 달업는 어두운 밤이나 태양 없는 극지(極地)보다도 더 쓸쓸하고 적막하야 그야말로 ‘춘래불이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구나)’을 늣기게 될 것이다." 위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별건곤》 제20호(1929년 4월 1일)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4월이 되면 한국은 온 나라가 벛꽃축제로 들썩이지만 이는 일본 사람들의 하나미(花見, 벚꽃구경)를 들여온 것일 뿐입니다. “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 일본 놈들이 자기 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 대대적으로 벚나무를 심었어요. 자그마치 1,800그루를 심은 겁니다.” 창경원 수의사였던 김정만 선생의 말을 들으면 벚꽃축제에 열광하는 모습이 기가 막힙니다. 실제 우리 겨레는 봄이

조선시대 귀한 먹거리였던 후추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2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에 도착하자 잔치를 베풀어 접대하였는데 예조판서가 주관하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후추를 잔칫상 위에 흩어놓으니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빼앗으려고 뒤죽박죽이었다. 야스히로가 숙소로 돌아가 탄식하면서 통역관들에게 ‘너희 나라는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망하지 않는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조선을 염탐하러 왔던 일본 사신이지요. 야스히로는 궁궐에서조차 후추를 놓고 아수라장이 된 것을 보고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나오는데 그만큼 조선시대에 후추는 조선에서 나지 않는 귀한 먹거리였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성종실록》 140권, 13년(1482년) 4월 17일 기록에 보면 일본 사신에게 후추 씨를 구해 보내라고 했지만 “후추는 남만(南蠻, 자바)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항상 본국에서 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에 청하고 유구국은 남만에 청하는 것으로 후추 씨는 얻기가 어려울 것 같다.”라고 변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