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공명첩(空名帖)을 전라도에 팔아 진휼의 자본에 보태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관찰사(觀察使)의 청에 따른 것이다. 대개 공명첩은 60살 이하의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것이 법례(法例)였다. 그러나 흉년이 들어 곡식은 귀하고 응모하는 자는 매우 적어서, 나이와 값을 감하여 50살 이상으로 한정하고, 쌀 여섯 섬[石]을 바치는 자에게 팔도록 하였다.” 위는 《숙종실록》 13권, 숙종 8년(1682년) 12월 4일 기록으로 전라도에 공명첩을 팔아서 먹을 것이 없어 곤궁한 백성들을 도와주는 데 보태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공명첩(空名帖)이란 성명을 적지 않은 임명장(任命狀)으로 관아에서 부유층에게 돈이나 곡식 따위를 받고 관직을 내리되 관직 이름은 써서 주나 이름은 쓰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명첩을 받고 임명된 사람은 실제 일은 하지 않고 허울만 행세했습니다. 여기 공명첩을 보면 문서를 발급한 때는 대한제국 때인 광무 6년 3월 아무개 날로 날짜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옥새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날인되어 있지요. 날짜가 없다는 것으로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문서는 가짜 임명장 곧 공명첩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소를 잡지 못하게 함은 올해 농정(農政)과 가장 큰 관계가 있는 일이다. 평년에는 혹 임시로 장패(藏牌)* 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는 풍년이 들어 흥청거리는 정사이지 결코 흉년에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의정부에서는 앞서 미리 각 행정구역에 알려 전보다 갑절 엄히 단속하게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도 미리 단속함과 아울러 도성의 안팎에 거듭 분명히 알아듣게 하여 금령(禁令)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좌ㆍ우 포도대장도 한결같이 두루 알도록 하라.“ 위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1832년) 12월 1일 기록으로 흉년을 맞아 소를 잡지 못하게 함을 온 나라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는 조선시대 농경 사회에서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등 농사의 핵심 일꾼으로 여기는데 흉년에는 곡식 생산이 더욱 어려워지므로, 소를 보호해 농업 기반을 지키는 것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근본으로 알았던 사회(조선시대) 전체의 생존에 직결되었지요. 또한 이 ‘우금’은 소 돌림병이 생겼을 때도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도살한 사람을 유배 보내는 등 엄히 다스렸어도 소고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1452년) 11월 28일 기록에 보면 “춘추관에서 《고려사》를 인쇄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란 내용이 보입니다. 《고려사》는 조선전기 문신 김종서ㆍ정인지ㆍ이선제 등이 세종의 명으로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문종 원년에 펴낸 기전체의 역사서지요. 여기서 기전체란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기술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태조에서 공양왕까지 32명 임금의 연대기인 세가 46권, 천문지에서 형법지까지 10조목의 지 39권, 연표 2권, 1,008명의 열전 50권, 목록 2권을 합해 모두 139권 75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려사》를 펴낸 목적은 조선이 고려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고려 말기의 부패와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반영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 서술 태도는 유지되었습니다. 특히 그 편찬 체재가 기전체였으므로 반복되는 기사도 모두 실을 수 있었으며,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빠뜨리지 않고 거의 모두 수록했는데 인물 평가에도 객관적인 서술로 고쳐서 썼으며, 한 개인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자료가 있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대로 네거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900m쯤 가면 서울역사박물관을 막 지나 오른쪽에 한자로 ‘興化門(흥화문)’이라고 쓰인 경희궁의 문이 보입니다. 광해군은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 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누르기 위하여 그 자리에 경덕궁(慶德宮)을 짓게 했습니다. 이 경덕궁은 영조 36년(1760)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으며,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궐(東闕)인 창덕궁에 견줘 서궐(西闕)이라고 불렀지요. 이 경희궁에는 여러 임금이 머물렀는데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승하했습니다. 또 경종이 태어난 곳도, 영조가 승하한 곳도, 정조가 즉위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경희궁은 창건 때 정전ㆍ동궁ㆍ침전ㆍ제별당ㆍ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으며, 그 넓이가 자그마치 7만 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런 경희궁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일본인들의 학교로 쓰이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습니다. 특히 1907년 궁의 서쪽에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5년엔 경성중학교까지 들어서게 됩니다. 심지어 광복 뒤에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쓰이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제급은 금표가 있는 땅에 장사를 지낸 죄가 있고, 백윤진은 점지(點指)해 준 죄가 있다.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고도 그 땅에 장사 지낸 것은 죽을죄고, 범하지 못할 곳인 줄을 알면서도 장사를 지내라 한 것도 죽을죄다. 똑같은 죽을죄로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나라에 법이 있는 바에 어찌 죽음을 면하겠는가? 다만 (가운데 줄임) 그 할아비의 공은 나라에서 잊지 못할 바가 있으니, 특별히 대대로 용서해 준다는 뜻으로 한 가닥 목숨만은 붙여주어 사형에서 감하고 원악도(遠惡島,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가 어려운 섬)에 유배토록 하라.” 위는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1832년) 11월 24일 기록으로 나라가 소나무를 기르기에 금표를 세운 산에 몰래 장사를 지낸 사람을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토록 한다는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등 궁궐을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음은 물론 소나무는 임금의 관을 짜는 데도 쓰고,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인 배 만들 때도 쓴 귀한 나무였습니다. 특히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고 으뜸으로 쳤습니다. 또 나라에서는 '황장금표(黃腸禁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22일)은 24절기 가운데 스무째인 소설입니다. 절기 이름이 작은 눈이 내린다는 뜻으로 소설(小雪)인데 추위가 시작되기 때문에 겨울 채비를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한겨울에 든 것은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추므로 작은 봄 곧 소춘(小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때는 평균 기온이 5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첫 추위가 옵니다. 그래서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전할 정도지요. 그런가 하면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으며,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소설 전에 김장하기 위해 서두르고,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위한 일들에 분주합니다.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고, 목화를 따서 손을 보기도 하며,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을 모아두기도 하지요. 참고로 같은 동아시아권인 중국과 일본의 소설 풍습 가운데 재미난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영양 보충과 체온을 높이기 위해 만두, 고기 등을 먹습니다. “겨울엔 따뜻한 음식으로 기를 보한다(补冬)”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츠케모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서 요구한 대장경(大藏經) 인쇄판을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절과 신사(神祠)에 비치해 둘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귀국의 사신이 돌아가는 배에 부탁하여 한 질을 청구하오니, 반드시 7천 권을 모두 갖춘 인쇄본으로 부쳐 오면 백마(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어 맹세한 것)의 지난 일을 금오(金烏) 해가 돋는 곳에서 거듭 보게 되겠습니다. 이웃나라의 변하지 않는 서약이 어떤 일이 이와 같겠습니까.“ 위는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1443년) 11월 18일 기록으로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음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보인 《팔만대장경》은 목판본이 6,815권으로 모두 8만 1,258매이며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은 몽골의 침입 때 불타버린 뒤 1236년(고종 23)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기로 유명합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우왕 14년(1388)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 주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에 낸 문제가 혹 다음 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한 것이 혹 지방에서 나오기도 하며, 유생이 사사로이 지은 문제가 역시 국시(國試)에서도 나올 수 있어서 혹 남의 작품을 외웠다가 합격하는 자도 있고, (가운데 줄임) 또 과장이 엄격하지 못해 무뢰배가 요란하게 밟고 다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갖은 수단으로 엿보고, 책을 끼고 들어와 답안을 대신 써주므로 공부하는 자가 이 탓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위는 《명종실록》 8년(1553) 6월 9일 자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8년(1794)에는 "손으로 붓 잡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분수없는 생각을 가지고 함부로 과거에 응시한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응시생인 양반집 자제들은 과거장에 여러 명의 조수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글을 짓는 '거벽(巨擘)', 글씨를 써주는 '서수(書手)'가 따라 들어갑니다. 정작 과거를 보는 사람은 손도 까닥 안고 대리시험을 보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먼저 잡고 답안지를 다 쓰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답안지를 대신 내주는 '선접군(先接軍)'이 있었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소중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구차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본래 생각이었다. 이 책을 간행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 공사에 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1796년) 11월 9일 기록으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을 펴냈음을 날리고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조선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 ‘화성(華城)’을 쌓은 경위와 제도ㆍ의식을 기록한 책입니다.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에 걸쳐 쌓은 화성성곽은 큰 토목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김종수(金鍾秀)에게 명을 내려,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해 11월 9일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801년(순조 1) 9월에 인쇄하였습니다. 화성성곽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무덤을 1789년(정조 13) 10월 화산(花山: 지금의 융건릉)으로 이장한 뒤 3년에 걸쳐 쌓은 곳으로, 전체 길이 5.4km가량의 조선시대 축성기술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아홉째 ‘입동(立冬)’으로 겨울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겨레는 이날 '치계미(雉鷄)' 잔치를 벌였습니다. 치계미는, 입동(立冬)ㆍ동지(冬至)ㆍ섣달그믐날 같은 때에 마을에서 양로 잔치를 벌였던 것을 말합니다. 본래 치계미는 사또의 밥상에 올릴 반찬값으로 받는 뇌물을 뜻하였는데, 마치 마을의 노인들을 사또처럼 대접하려는 데서 온 풍속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한해에 한 차례 이상은 치계미를 위해 금품을 내놓았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도랑탕 잔치’로 대신했습니다. 입동 무렵 미꾸라지들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도랑에 숨는데 이때 도랑을 파면 누렇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었고, 이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 노인들을 대접했는데 이를 도랑탕 잔치라고 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어르신들의 원기 회복과 건강을 비손하는 따뜻한 공동체 문화였습니다. 미꾸라지는 한의학적으로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어 비위(脾胃)를 보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추어탕은 뼈째 끓이기 때문에 칼슘, DHA, 비타민 등 겨울철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