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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생명 깨우는 고요한 합창, 아지랑이

아지랑이, 삶에도 기분 좋은 일렁임이 시작되기를 [정운복의 아침시평 306]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겨울의 묵직한 외투를 벗어 던진 대지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때, 지표면 어디쯤에선가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대지가 겨우내 품어온 뜨거운 생동감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봄의 지문(指紋)이자, 잠든 생명을 깨우는 고요한 합창입니다. 아지랑이는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지만, 세상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흔들어 놓습니다. 메마른 논둑길 위로, 혹은 보리밭 사잇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딱딱했던 세상의 경계는 이내 부드러워집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지만,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멀어지는 그 움직임은 마치 대지가 추는 느릿한 춤사위와 같습니다. 아지랑이 너머로 보이는 원경(遠景)은 마치 덜 마른 수채화처럼 번져 나가고, 그 일렁임 속에서 세상은 잠시 현실의 무게를 잊은 채 몽환적인 꿈을 꿉니다. 아지랑이는 단순히 공기의 밀도 차이가 만들어낸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가운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려 애쓰는 씨앗들의 거친 호흡이며, 얼어붙었던 강물이 풀리며 숨 쉬는 안도감입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 이미 봄의 맥박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햇살이 지면을 애무

미(美)에 대칭되는 말, 오(惡)는 미가 부족한 것

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6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난주에 공대 학장인 ㅂ 교수가 미녀식당에 와서 미스 K와 차를 마시는 중에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가 나왔단다. 우리나라 라면 업계에서 3위를 유지하고 있는 대기업 회장의 아들인 ㅂ 교수는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유명 공대에서 미사일 유도 기술을 공부한 그는 졸업한 뒤 바로 무기 관련 미국 회사에 취업하여 잘 나갔다. 그러다가 나이 50을 넘게 되자 고향 생각도 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어서 귀국했는데, S대 총장이 학장으로 초빙하여 뒤늦게 교수가 되었다. 외국 여행이 취미인 ㅂ 교수는 방학만 되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ㅂ 교수는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파스타 요리를 좋아한단다. 몇 년 전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여행 갔다가 우연히 책방에서 영어로 쓰인 파스타 요리책을 한 권 사왔다. 그런데 미스 K가 파스타 요리를 연구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 책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아름다움, 곧 미(美)에 관한 것이었다. ㅅ 학장이 미스 K에게 물었다. “K 사장님은 40대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할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20대로 보여요.” “호

검무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기원이 아닌 전승으로 읽는 춤 [이진경의 문화 톺아보기 28]

[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검무(劍舞)는 단순한 춤이 아니다. 칼이라는 무구를 들고 춘다는 점에서, 이 춤은 인간의 생존과 권력, 그리고 의례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그래서인지 검무의 기원을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그러나 실제 전승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검무는 단일한 출발점에서 비롯된 춤이라기보다 여러 시대와 문화가 겹겹이 쌓이며 형성된 결과에 가깝다. 최근의 논의는 이러한 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 학술 발표에서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은 검무의 기원을 ‘항장무’와 연결지어 설명하였다(우리문화신문, 2026. 3.20). 항장무는 중국 《사기》 「항우본기」의 홍문지연 서사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평안도 지역에서 잡극 형태로 유행하다가 궁중 정재로까지 수용된 춤으로 알려져 있다(손선숙, 2023). 한편 국가무형유산 제15호 북청사자놀음 동선본 전승교육사는 북청사자놀이 전승 과정에서 항장무 계열로 해석될 수 있는 음악이 전승자 없이 음악적 형태로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경욱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북청사자놀이에는 칼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초장ㆍ중장ㆍ종장으로 나뉘어 점차 속도가 빨라지는

고려의 차, 한반도에서 제도와 의식으로 꽃피어

고려 전기부터 관청 다방(茶房)이 있었다 [라석의 차와 시서화] 10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고려의 차는 더 이상 바다와 대륙을 건너온 흔적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질서로 완성된 문화 현상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지나온 차가 고려에 이르면, 그것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 제도와 의식, 그리고 삶의 리듬 속에 깊이 자리 잡는다. 백제의 차가 바다를 건너 타지에서 더욱 또렷해졌다면, 고려의 차는 오히려 이 땅 안에서 더욱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다방(茶房)이 있다. 고려 전기부터 설치된 이 관청은 궁중의 차 의례를 맡아 나라 행사마다 차를 준비하고 올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 원회(元會)와 같은 국가적 대의례는 물론, 왕비 책봉과 태자 책립, 공주의 혼례와 원자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차는 빠지지 않았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국가 질서를 맑히는 예의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에는 분명한 의미의 다례(茶禮)가 존재하였다. 비록 후대 조선처럼 ‘다례’라는 이름이 엄밀하게 정식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폭넓고 깊은 차 의식이 국가와 불교의식 전반에 걸쳐 시행되었다. 임금이 신하에게 차를 내리고, 신하가 다시 차를 올리는 과정은 단순한

축구와 애인 이야기를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6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중소기업 사장으로서 세상 물정에 밝은 ㄹ사장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애인은 젊을수록 좋다니까, 아가씨가 아줌마보다 좋기는 하죠. 그러나 아가씨는 위험해요. 일본에서 시작된 원조 교제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나라도 요즘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데 돈 많은 중년 남자가 젊은 아가씨를 돈으로 유혹하는 거죠.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사회가 되다 보니 사람들이 모두 돈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젊은 아가씨도 물론 돈을 좋아하죠. 그런데 아가씨를 사귀다가 갑자기 임신했다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본부인과 이혼하고 자기하고 결혼하자고 덤비면 대책이 없습니다. 혼빙간이 되면 골치가 아프지요.” “혼빙간이 뭐에요?” K 교수가 물었다. “아, 혼인 빙자 간음죄를 줄여서 ‘혼빙간’이라고 한답니다. 애인 상대로는 유부녀가 좋습니다. 돈도 적게 들고 또 비밀을 잘 지켜주니까요. 가정을 깨지 않는 조건으로 서로 즐기는 거죠. 유부녀 가운데는 의사 부인이 좋습니다. 돈 많고 시간 많으니까요. 의사라는 직업이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인가 봐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술을 많이 먹고 바람피우는 남자 의사도 있고. 남편이 바람을 피

서두르지 않는 철원의 봄

단단한 대지가 건네는 따스한 위로를 받는다 [정운복의 아침시평 305]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시인 이상화는 “빼앗을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했지만 철원은 6.25를 통하여 빼앗은 들인데…. 그 빼앗은 들에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 유난히 길고 매서운 곳, 그래서 그 땅에 찾아오는 봄은 그 어느 곳보다 절절하고 극적입니다. 한반도의 허리, 철원의 봄은 단순히 계절의 바뀜을 넘어선 생명의 승리와도 같습니다. 철원의 봄은 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한탄강의 주상절리 사이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깨지는 파열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수만 년의 세월을 견딘 현무암 협곡 사이로 흐르는 옥빛 물줄기는, 겨우내 멈췄던 대지의 혈관이 다시 뛰기 시작했음을 알립니다. 차가운 강물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마치 대지의 긴 안도의 한숨 같습니다. 철원의 봄은 색깔로 기억됩니다. 철원평야의 드넓은 벌판이 누런빛을 벗고 옅은 연둣빛으로 물들어 갈 때, 그 위를 수놓는 것은 이제 떠나갈 준비를 하는 두루미들의 우아한 날갯짓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비무장지대(DMZ) 안쪽에는 얼레지, 바람꽃, 얼음새꽃 같은 들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밉니다.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상처 위로 가장 부드러운 꽃잎이 돋아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