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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바람과 함께 찾아온 추위

[하루 하나 오늘 토박이말]된바람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어느덧 올해도 딱 이틀 남았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은 그렇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집을 나서다 흠칫 놀라 몸을 잔뜩 웅크리신 분들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기별종이(뉴스)를 보니 오늘 아침에 영하 8도까지 뚝 떨어진 곳이 있고 앞으로 여러 날동안 추울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 춥게 만드는 건 바로, 살을 에는 듯 쌩쌩 불어오는 바람 탓일 겁니다. 한해 끝자락에서 만난 이 매서운 추위와 함께 찾아올 바람을, 흔히 쓰는 ‘강풍’라는 말 말고 우리 토박이말 '된바람'으로 불러보면 어떨까요?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이 말의 맛이 더욱 살아납니다. 첫째로 '매섭게 부는 바람'을 뜻합니다. "갑자기 된바람이 불어와 담벼락을 무너뜨렸다."는 보기월처럼, 무언가를 무너뜨릴 듯 센 바람을 일컫지요. 여기서 '된-'은 '반죽이나 밥 따위의 물기가 적어 빡빡하다' 또는 '심하다'는 뜻을 품고 있어, 물기 없이 독하고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의 됨됨(성질)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이 말은 바다 위에서 더욱 알맞게 쓰였습니다. 뱃사람들의 말로 '북풍'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강하게 불어오는 된바람 때문에 노를 젓기가 무척 힘들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일생

《조선시대 양반은 어떻게 살았을까》 허인욱, 토토북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양반. 양반은 조선시대 관료층의 양대 축이었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양반은 양반과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이었다. 양반이 조선의 법, 제도, 문물과 불가분의 관계였기에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반의 생애를 시기별로 보여주는 이 책, 《조선시대 양반은 어떻게 살았을까》는 김 판서댁 아들로 태어난 똘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일생 전체를 혼인이나 과거급제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과 함께 보여주는 책이다. 똘이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명문가 자제로 태어나 높은 관직에 올랐던 양반의 인생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 #장면1. 즐거운 책거리 날 옛날 서당에서는 훈장이 학동들이 배우는 책을 완전히 다 익혔다고 판단하면, 자그마한 잔치가 열렸는데 이를 ‘책거리’, 또는 ‘책씻이’라 했다. 책거리는 책을 뗀 학동의 부모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조촐히 음식을 준비해 마련했다. 왕실에서도 이런 풍습이 있어 정조 역시 책거리를 했던 기록이 《홍재전서》에 남아 있다. (p.31) 지난 어린 시절 책 한 질을 읽고 나면 어머님께서 간략한 음식을 차려 주셨는데,

새로운 때의 첫발, '비롯하다'로 떼다

[하루 하나 오늘 토박이말]비롯하다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오늘 아침, 여러분도 새로운 기별을 들으셨지요? 이재명 한머슴(대통령)이 용산 일터를 닫고 다시 푸른집(청와대)으로 옮겨 처음으로 일을 하러 나왔다는 기별 말입니다. 푸른집(청와대)에 다시 봉황 깃발을 높이 걸고 나라 살림을 꾸리는 새로운 때가 열렸다고 하니, 느낌이 참 새롭습니다. 이와 같은 날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작(始作)'이라는 한자말은 어쩐지 틀(기계)처럼 일을 벌인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메마르게 다가옵니다. 오늘 같은 날, 우리 가슴속에 더 깊은 울림을 줄 토박이말이 있습니다. 바로 '비롯하다'입니다. '비롯하다'라는 말은 '어느 실마리가 되어, 드디어'라는 뜻을 가진 어찌씨(부사) '비로소'와 뿌리를 같이 합니다. 그래서 그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넘어, 없던 것이 처음으로 생겨나거나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처음으로 시작하다'는 벅찬 뜻을 품고 있습니다. 장용학 님의 소설 <요한 시집>을 보면 이 말이 얼마나 묵직한 처음을 나타내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네 살 적에 젖을 버리고 쌀을 먹기를 비롯했다." 아기가 젖을 떼고 처음으로 밥을 먹는 일, 그것

사랑은 자연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속임수다

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4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모든 생물이 양성생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개체가 세포분열에 따라 둘로 나뉘면서 새로운 개체가 태어나는 방법도 있다. 세포 분열하는 단세포 생물은 암수가 없어서 성은 하나이다. 세포 분열을 무성생식 또는 단성생식이라고 한다. 크기가 아주 작은 생물들은 단성생식을 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세균과 바이러스, 그리고 플랑크톤 등의 미생물들은 단성생식을 한다. 크기가 큰 생물들, 예를 들면 하늘을 나는 새와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곤충과 양서류 포유류 등의 동물들은 양성생식을 한다. 또한 온갖 풀과 나무 등 식물들도 모두 양성생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양성생식이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생물학계에 남겨진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다. 불완전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학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양성생식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진화의 초기 단계, 곧 남조류가 나타났던 30억 년 전부터 어류가 나타난 약 6억 년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생물은 단순하게 세포 분열에 따라서만 증식되었다. 무성생식 생물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죽음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여기에 한 개의 단세포 플랑크톤이 존재하고

마음을 나누는 '노느매기'의 힘

[하루 하나 오늘 토박이말]노느매기

[우리문화신문=이창수 기자] 갑작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아침,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기별이 들렸습니다. 한뉘(평생) 한약방을 꾸리며 번 돈을 아낌없이 배움이와 이웃에게 내어주셨던 진주의 큰 어른, 김장하 스승님의 이야기입니다. 스승님께서 꾸리시던 옛 '남성당 한약방'이 고장 사람들의 배움터인 '교육관'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바라는 것 없이 베푼다는 뜻을 이어받아, 이제는 집마저 내어놓으신 스승님의 삶을 보며 저는 문득 '기부'나 '나눔'이라는 말보다 더 깊고 튼튼한 우리말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바로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토박이말, '노느매기'입니다. '노느매기'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는 일, 또는 그렇게 나누어진 몫'이라고 풀이를 합니다. 이 말은 곰곰이 뜯어보면 볼수록 그 맛이 더 깊어집니다. 옛말에 '나누다'는 뜻을 가진 '놀다'의 끝바꿈꼴(활용형)인 '노느'에, 몫을 정한다는 뜻의 '매기다'에서 온 '매기'를 더한 말이지요. 그저 가진 것을 뚝 떼어 주는 게 아니라, 너와 내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의 몫을 살피고 고루 나눈다는 동아리(공동체)의 따뜻한 마음이 이 낱말 속에 오롯이 배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김옥균과 박영효가 대원군에게 제시한 것

대원군, 조선의 정치는 김옥균과 박영효가 맡아라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62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2007년 일본에서 펴낸 《伊藤博文文書(이등박문문서)》에는 ‘대원군 음모에 관한 시말’이라는 제목으로 대원군과 김옥균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내막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제출한 문서인데 김옥균의 뜻과 행동 나아가 당시의 정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로 보인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참고: 김흥수 홍익대 교수의 2020 논고 <김옥균의 최후>) 1887년경 박영효는 일본인 오가와 미노루(小川實, 1887년 이래 조선에 제분-製粉 교사로 고용되었는데 주로 무기 구매를 중개함) 편에 대원군에게 서한을 보내 국사를 도모할 것을 타진한다. 이어 1891년 2월 신화폐 주조를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도쿄에 온 안경수에게 대원군 앞 편지 전달을 부탁하였다. 편지에서 대원군에게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대원군이 임금에 상주하여 온건한 방법으로 국정을 개량. 둘째,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씨 세력을 제거하여 국정을 개혁. 셋째, 둘 다 불가능하면 수단을 다해 일본으로 건너오실 것. 귀국한 안경수는 이 편지를 오가와에게 주고 오가와가 대원군에게 전한다. 이에 대원군은 “온 조정이 놀라서 들썩거릴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

흥남철수작전 때의 지휘관 아몬드 중장을 오래 기억해야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333]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950년 12월 20일 북한 동해안의 가장 큰 항구인 흥남항의 부두는 10만의 미군들과 장비들, 그보다 더 많은 북한주민이 뒤섞여 큰 혼란이 벌어졌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간신히 흥남으로 온 미군들의 남쪽으로의 철수가 최대의 과제였다. 당시 동해안 지역을 관할 하는 제10군단의 에드워드 아몬드 (Edward Almond) 군단장은 모든 가용 군함을 동원해 적군의 포화가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에서 미군들의 철수작전을 펼쳤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주민은 마을마다 집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흥남부두로 향했다. 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곧 참혹한 현실 혹은 죽음이었다. 이같은 사정을 본 맥아더 사령부의 민사고문인 현봉학 박사는 미군 군함에 피난민을 함께 실어달라고 아몬드 군단장에게 긴급 요청했으나 당장 군인들의 생명을 구해야 할 상황에서 피난민을 수송할 수는 없었다. 현봉학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 10군단 참모부장겸 탑재참모였던 미 해병대의 포니(Edward S. Forney) 대령을 통해 다시 간절히 요청한다. 결국 그의 진심과 간절함에 아몬드 중장이 결단을 내려 피난민들의 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