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천1호 고분의 아픔 내려다보면 푸른 오리나래 (빛) 말 타고 사냥턴 이 어디 갔나 (돌) 뒷산 그리메로 낙엽은 지고 (달) 풍류도 회복할 날 기약하네 (심) ... 24.11.11. 불한시사 합작시 길림성의 집안시에서 압록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장천분지(長川盆地)의 동쪽에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 아담한 고분 두 채가 있다. 둘레가 88m에 높이가 6m로 그곳에서 가장 큰 봉토돌방무덤이다. 장천1호 고분은 불교내용을 많이 담은 묘실벽화로 유명하다. 당시 도교적 신화로 채워진 중국 남북조 시대의 고분과 뚜렷이 구분된다. 묘실 앞방에 예불도, 보살도 및 비천도가 그려졌고, 연꽃그림이 무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제작 시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인 5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불한시벗 가운데 한 분은 1990년대 초에 방문하여 묘실벽화를 직접 보았다. 그 감동을 맛보려 모두 설렘에 부풀어 있었지만, 막상 묘실이 닫혀있는 사연을 듣고 뜨악했다. 묘실벽화가 도굴꾼에게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도굴꾼 가운데 장천마을 사람은 잡혀서 사형당했다는데, 나머지 도망간 한국인들은 오리무중이란다. 그들은 묘실벽화의 한 부분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다음 날 오후, 강의 시간이 비는 틈을 타서 K 교수는 학교에서 가까운 봉담읍 장터에 나갔다. 모종과 묘목을 파는 가게에 가서 3,000원 주고 조롱박 모종을 3개 샀다. 모종을 차에 싣고 미녀식당으로 갔다. 마침 미스 K가 자리에 있었다. K 교수는 모종을 얼른 내려놓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서 차도 마시지 않고 식당을 나왔다. 미스 K가 문밖에까지 따라 나오며 정(情)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롱박을 잘 키우겠습니다. K 교수님, 정말 고마워요.” 계절은 이제 늦봄이 지나고 있었다. 미녀 식당의 베란다 밖으로 보이던 화려했던 봄꽃은 어느새 다 지고 이제는 잎이 무성해졌다. 개나리, 목련, 수수꽃다리, 장미에 이어서 향기가 진한 아카시아꽃이 피었다. 아카시아꽃은 꿀이 많아서 양봉업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꽃이다. 아카시아꽃이 질 무렵이면 봄도 물러난다고 볼 수 있다. 며칠 뒤, K 교수는 공과대학의 나 교수와 점심시간에 미녀식당에 갔다. 나 교수 역시 미스 K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K 교수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마도 나 교수가 경쟁이 될지도 몰라. 나 교수는 서울 출신이어서 그런지 시골 출신인 K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야쿠시지(藥師寺) 묘지 ‘만령의 탑’ 여야용묘(呂野用墓)를 뒤로하고, 우리는 야쿠시지(藥師寺) 인근 산기슭으로 향했다. 살짝 오르막길을 오르면 오른편으로 평평한 자리가 나오는데 옛날 조선인 노동자들이 묵었던 현장 식당(함바) 자리였다고 한다. 그곳을 지나 왼편으로 꺾어서 언덕을 오르자 돌 비석들이 모여 있는 야쿠시지 묘지가 나타났다. 그 왼쪽 끝, 관음상이 서 있는 큰 단상이 바로 ‘만령의 탑’이었다. 왼쪽 아래로 작은 지장보살이 셋 있었다. ▲ ㅎ 선생님과 나는 바닥을 덮은 낙엽을 손으로 걷어냈다. ㅎ 선생님은 관음상 양옆에 놓인 꽃병에 물을 붓고 준비해 오신 꽃을 꽂고 향을 피우셨다. 필자는 한국에서 준비해 간 술을 따르며 예를 올렸다. . 여야용묘 건립 이후로도 죠쇼지(常照寺)에 타고 남은 숯과 함께 섞인 조선인 유골이 시멘트 포대 두 개에 담겨 왔다. 이는 1940년 아조하라다니(阿曾原谷) 눈사태 때 희생된 조선인 무연고자 유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죠쇼지(常照寺)의 당시 주지인 히구치 요시노리(樋口惠昇) 스님은 우나즈키(宇奈月) 쥬도쿠지(樹德寺) 주지스님과 상의하고 당시 우치야마(内山) 촌장에게 부탁해서 우나즈키 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