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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오키나와, 평화헌법과 친일파에 의한 일본 복귀

[오키나와 자전거 평화기행 ④]

[우리문화신문=이규봉 교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같은 연합국인 소련의 남하에 대항해 일본을 친미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일본의 천황제는 이용가치가 매우 크다고 봤다. 그래서 히틀러 못지않은 A급 전범인 히로히또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상징적인 천황의 지위를 유지시켰다.

히로히또는 맥아더에게 미군의 일본 장기 주둔 보장을 약속했다. 또한 그때만 해도 국민당 정부인 중국이 친미국가이기에 미국의 세계전략으로 볼 때 일본을 비무장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에 상징적인 천황제와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을 만들게 했다.

일본은 헌법상 평화국가였지만 오키나와는 예외였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은 전략상 공격기지와 후방지원기지로 일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오키나와를 세계전략에 있어 중요한 군사요충지로 생각했다. 그래서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독립시켰지만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일본에 반환할 때까지 군사식민지로 삼았고 이후에도 미군은 항구적으로 일본에 주둔을 하고 있다. 마치 쿠바를 반식민지로 삼고 강제로 관타나모를 빼앗아 미군기지를 설치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는 것과 같다.

 

미군, 헤이그협약을 위반하며 토지 강제로 수용

미군은 종전 뒤 사유재산 몰수를 금지하는 헤이그협약을 위반하며 토지를 강제로 수용했다. 전후 미군은 생존 주민을 1년간 16개 지역 수용소에 감금하고 총검과 불도저를 이용해 폭력적으로 토지를 강제 접수하여 주민의 귀환을 막았으며 사용료조차 지불하지 않았다.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한 1972년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미군용지를 계속 사용하도록 합법화시켰다.

오키나와는 1960년대 초부터는 베트남 전쟁의 후방기지로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1965년 12월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오키나와 없이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으로 불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확대를 배경으로 오키나와의 기지 확보와 증강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민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실현할 일석이조의 책략으로 반환하기로 했다. 그 대신 주일미군의 활동 범위를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었을 때 “핵무기 없이 본토 수준으로” 돌려받았다고 했으나 이는 거짓으로 언제라도 핵무기를 도입할 수 있는 밀약을 체결했으며 “미군 지배 하에서 군용지로 사용해온 토지는 소유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복귀 후 5년 동안 군용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공용지법으로 미국은 모든 기지를 그대로 보유했고 자유로운 기지 사용을 보장받았다. 일본은 미군 유지를 국가정책으로 채택하여 거액을 미국에 지불하고도 매년 미군의 주둔경비를 증가시켜왔다.

 

오키나와는 왜 일본으로 복귀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교원노조가 중심이 되어 일본에 복귀하는 것을 추진했다고 한다. 교사 집단은 주민을 집단자살하게 한 황민화 교육에 앞장선 친일파 그룹이었으나 미국은 이들을 계속 남아있게 하였다. 마치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나서도 친일파들이 계속 사회 기득권층이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지식인의 원로급으로 성장해 일본으로 복귀하는 것을 주도한 것이다.

 

   
▲ 미군기지 앞의 시위 현장

 

   
▲ 시위 하는 사람들과 필자(가운데)

 

자전거 타는 마지막 날이다. 아침이 숙박비에 포함되지 않아 일찍이 출발할 수 있었다. 비는 약하지만 띄엄띄엄 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국도 58번을 찾았다. 길가에는 24시간 영업하는 식당들이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가는 쪽에 맥도널드가 눈에 띄어 아침을 먹기 위해 들렸다.

오늘 갈 곳은 후텐마 기지가 이전하기로 되어있는 헤노꼬와 오키나와 전투로 사망한 자들을 기리는 평화기념공원이다. 잠시 가니 왼쪽으로 가는 329번 도로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와 동쪽으로 넘어갔다. 산마루에 오르니 미군기지(Camp Schwab)가 나오고 그 앞에서 시민들이 시위하고 있었다.

헬맷을 쓰고 푸른색의 옷을 아래위로 입은 용역인듯한 사람들이 문 입구에 서 있었다. 이런 것이 늘 문제다. 여자의 적은 여자이고 가난한 자들의 적은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던가. 용역들이 누군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아닌가? 나름 돈 좀 벌겠다고 가진 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대치하는 사람들 아닌가? 권력 있고 돈 있는 자들은 늘 돈으로 용역을 사서 대신하게 한다. 힘없고 돈 없는 서민들은 늘 몸으로 맞서야 한다.

 

   
▲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헤노꼬 바다는 미군 비행장을 짓기 위해 매립될 위기에 처해 있다.

 

   
▲ 시위 펼침막에는 한글로도 쓰여 있어 반가웠다.

 

맞춤식 환경영향 평가

한 사람은 도쿄에서 왔다고 하며 우리를 매우 반겼다. 철조망에는 한글로 된 현수막도 걸려있었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저 얕은 바다를 매립하고 그곳에 미군 비행장을 짓겠다는 것이다. 그곳엔 세계적 희귀종 듀공이 사는 곳이다. 듀공은 초식만 하는 유일한 해양 포유류로 새끼를 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이 사람을 닮았다고 한다.

어찌 환경영향평가를 통과했을까? 하긴 우리나라도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있는 환경영향 평가라는 것이 전문가들이 알량한 평가비 받고 발주처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주는 요식행위로 변질되지 않았던가?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법원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4대 강이 그렇게 훼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헤노꼬 주변은 자연환경보존에 관한 지침에서 평가 1순위 지역이라 한다. 듀공, 바다거북이, 푸른산호 등이 자라고 있고 북부의 얀바루 숲은 동양의 갈라파고스라 할 정도로 다양성이 높은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임에도 편법으로 조사하고 맞춤평가가 강행된 것이다. 듀공 대 럼즈펠드 재판에서 ‘미 국방부는 듀공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 주는 영향을 배려해야 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고 2012년 당시 현지사도 환경영향조사가 불충분함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