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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문화재청은 2011년 초 근대음악유물 등록문화재 3편을 공고했다. 등록문화재제도50년 이상이 지난 것 중 역사, 문화, 예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급격한 멸실,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2001년도에는 건축물 및 시설물, 2005년도에는 동산문화재 분야에 도입한 제도이다.

 

이에 따라 근대기의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해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보존관리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광복군가집 제1(1943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펴냄), 애국창가 악보집(1916년 하와이 편찬 등사본),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악보(1949년 필사) 세 가지를 등록했다.


 

이상의 3가지 음악자료는 애국가의 수록을 주목한 자료이다. 처음으로 근대 음악인 애국가의 자료를 국가가 관리하게 된 것으로 바람직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자료에는 현 애국가의 해외동포사회 확산과 광복군 수용 사실, 그리고 안익태가 작곡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만으로는 현 애국가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부족하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사으로 시작하는 후렴이 사용된 <무궁화가>가 작사된 것이 1897년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으로 시작하는 가사가 작사 된 것이 1907년이고, ‘애국가로 민중의 공인을 받은 것이 31만세운동기를 통해서이고, 임시정부 광복군들에 의해 불려 국가적 위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가사 변화와 보급 상황, 특히 31만세운동 기간에 불린 애국가들의 상황, 많은 애국가들의 정체성도 함께 밝혀져야 함은 당연하다. 앞으로 더 많은 애국가 자료가 발굴, 정리되어 이 맥락적 간극을 메꿔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발굴된 필사자료들을 주목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이중에 1917년 수집정리된 애국창가집을 실례로 삼을 수 있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발굴된 애국창가집 중 애국가류를 인식하고 정리한 자료인데, 이는 191931만세운동 기간 전국에서 불린 다양한 애국가의 존재를 추정 할 수 있게 해 준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애국가류의 작사자나 수집 정리자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1910년대 이후 필사된 자료에 작사자가 밝혀진 것이 없다. 이 자료집에도 각각의 작품 정보가 없음은 물론, 수집정리자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자료의 핵심 가치는 애국가명칭 자료와 일반 애국창가를 구분하여 정리수록했다는 점이고, 이는 곧 1917년 전후의 애국가명칭 자료의 실상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전체 29종을 밝힌 목차는 다음과 같다.

 

애국가

 

1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2 애국가-산고수려 동반도는

3 애국가-긴날이 맛도록

4 애국가-동해의 돌출한

5 애국가-만왕 우리하나님계서는

6 애국가-우리나라 동반도난

7 애국가-화려한 강산 우리대한은

8 애국가-한반도 강산 우리대한은

9 애국가-어화우리 동포제군

10 애국가-대한강토 화려강산

11 애국가-동포들아 동포들아

 

 

애국창가

 

12 열려있난 쳥년들아

13 반도 동포되어서

14 사랑하는 우리인민들

15 웬말인가 날 위하야

16 신대한의 애국청년(신대한)

17 장하고 장하다 우리대한은

18 산높고 물맑은 우리동반도난

19 대조선제국 국민청년학생들아

20 용감한 정신물 빗나신 형님

21 참기쁨 음셩으로 노래하세

22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학도가)

23 하늘복이 두터운 우리나라에

24 간다간다 나는간다(안창호 거국가)

25 슬프도다 우리민족아(안창호 작사)

26 맛도다 맛도다

27 달렸네 달렸네 우리나라의

28 비나이다 전능상제

29 단군기자 군군하신 우리대한(괄호 안 표기는 필자)

 

 

이상과 같이 목차에서는 우리의 전통적 가사(歌辭) 작품 표기식대로 사설 첫 구를 곡명으로 밝혔다. 그리고 내용에서 애국가로 곡명을 밝혔다. 11편은 1917년 까지 애국가명칭으로 불러 온 자료들이고, 18편은 애국창가류이다. 명확히 애국가류를 앞에 편재시켜 중요성과 함께 종류를 밝혔다.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1~3번까지의 애국가이다. 1은 현 애국가고, 2는 김인식 <애국가>로 알려진 것이고, 3애국생 작사 <애국가>이다.

1. 애국가 - ‘동해물과 백두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 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일부 가사의 표기 정도만 다르고 현 애국가와 가사, 절 수(4)가 일치한다. 의미 있는 것은 첫 순서의 배치라는 사실인데, 바로 31만세운동 이전에 이미 이 애국가가 가장 선호도가 높았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2. 애국가 - ‘산고수려 동반도는

 

산고수려 동반도ᄂᆞᆫ 우리본국이오/ 품질됴흔단군조선 우리국민일셰

(후렴)무궁화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이 보전ᄒᆞ셰

애국ᄒᆞᄂᆞᆫ 의기열성 백두산과 갓고/ 충군ᄒᆞᄂᆞ일편단심 동해갓치깁고

이천만인 오직ᄒᆞᆫ마암 나라ᄉᆞ랑ᄒᆞ야/ 사농공상 귀천업시 직분을다ᄒᆞ셰

우리나라 우리황상 황천이 도으샤/ 만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ᄒᆞ셰

 

1910년 발행된 보성전문학교 교지 보중친목회보1호 문예란에는 김인식(金仁湜/1885~1963) 작사 愛國歌/KOREA”로 발표된 것이다. 그런데 확인 되는대로 제1절을 제외하고는 2~4절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그대로이다. 이로서 김인식의 작사 가사는 단 1절이고 나머지(2~4)는 표절(?) 또는 1897<무궁화가>의 전승 가사 수용이다. 그러므로 김인식도 우리나라 서양음악 지도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현 애국가 작사자로 거론 될 여지가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3. 애국가 - ‘긴날이 맛도록

 

1. 긴 날이 맞도록 생각하고

깊은 밤 들도록 생각함은

우리 나라로다 우리 나라로다

길이 생각하네 길이 생각

2. 내 먹고 마시고 의탁하여

모든 족속들과 생장한 곳

우리 나라로다 내 생 사랑해

길이 사랑하네 길이 사랑

3. 나의 부모 형제 같이 살고

선조들의 해골 묻힌데는

우리나라로다 항상 잊지 못하네

잊지 못하네 잊지 못해

4. 태산이 변하여 바다되고

바다가 변하여 돌이된들

나라 사랑하는 내 맘 변할 손가

길이 불변하네 길이 불변

5. 내 나라를 내가 사랑하지

누가 내 나라를 사랑할고

내 몸이 죽어도 내 나라 보존해

길이 보존하세 길이 보존

6. 우리 나라 문명 우리 나라 독립

발달되고 공고하면

빛난 영화로다 나라 영광일세

항상 즐겁겠네 나라영광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7절의 가사는 본보 2017628일자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따로 있었다>에서 제시한 <애국가> 가사와 일치하는 것으로, 1917년 필사자료에서도 존재가 확인 된 것이다. 이는 1908년 이후 10여 년 동안 애국가라는 명창으로 불렸음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료의 출전은 19082월 일본유학생 잡지 <태극학보> 18호에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태극학보 기사에 愛國生이 바로 안창호란 설명이나 각주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확인 된다.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도산학연구, 14·15합집, 2015)이란 이명화의 논문 등의 주장에서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흥사단 기관지인 1954년 발행 <새벽> 창간호에서 당시 남산고등학교 교장이며 1908년 당시 가장 가까이에서 활동했던 이강(李綱/1878~1964)<내가 본 안창호, 의 사람>이란 회상기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했다.

 

이강은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가 모집한 이민단에 합류, 하와이로 가서 영어를 배우고 1903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이 때 동향의 안창호를 만나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1904년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190511월 기관지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했다.

 

그리고 안창호가 일본을 거처 귀국하여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알려지는 1907년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로 하고, 안창호에 이어 귀국하였다. 그리고 4월에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비밀결사체 신민회를 조직하고 8월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를 설립하였다.

 

19092월에 미주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인 공립협회를 확대, 개편하여 재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조직하고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기자로 활동하다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제호를 고친 뒤에 편집책임을 맡았다. 이런 이력에서 볼 때 안창호가 이 애국가를 19072~19082월 사이에 작사했다고 할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매우 정학하다고 할 수 있다.


도산 선생의 自作子吟하던 愛國歌 一節긴날이 맛도록 생각하고/ 깊은밤 들도록 생각함은/ 우리나라로다 우리나라로다라고 한 것을 보아도 선생의 愛國性이 어떠한 것인가를 推測할 수 있다.”

 

이 기록의 애국가 일절로, 긴날이 맛도록 생각하고는 정확히 3번 가사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안창호의 필명이 애국생이란 사실과 그의 작사 애국가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한다. 사료의 발굴 의의는 이 같이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해 줄 때에 있다. 이 자료는 31만세운동 직전까지의 애국가종류와 애국가명칭 창가의 실상, 그리고 그 선호도를 알게 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