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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듣는 이야기

99년만에 서훈 받은 '곽영선 지사' 후손을 만나다

"훈장을 생전에 받지 못한 것 안타까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머님(곽영선 지사)은 여장부셨습니다. 어머님은 숭의학교 시절 만 열여섯살 나이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신 그 정신을 평생 지니고 사셨지만 딸들에게는 크게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평생 아버님과 함께 이웃을 챙기고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님이 의사였지만 돌아가셨을 때는 무료 진료하신 외상 장부 40권만 남기고 돌아가셨을 정도였으니까요. ”

 

이는 곽영선(1902.3.1.~1980.4.8.)지자의 따님인 장금실(80살) 여사의 말이다. 올해 8.15 광복절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25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선정했으며 곽영선 지사(애족장, 추서)는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기자는 어제(20일, 목요일) 낮 2시 쯤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는 곽영선 지사의 따님인 장금실 여사를 만났다.

 

약속 시간에 맞춰 찾아간 장금실 여사 댁은 창문 너머로 지리산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 숲이 가득한 조용한 아파트였다. 이곳에 미리 와서 기다리던 동생 장연실(76살)여사와 셋이서 마주앉은 기자는 99년 전 어머니 곽영선 지사의 숭의학교 시절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1980년입니다. 아버지가 그 1년 뒤에 돌아가셨지요. 그때만 해도 우리는 어머니의 독립운동한 사실이 ‘훈장’을 받을 일이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38년 만인 올해서야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게 된 것이지요”

 

팔순에 이르는 두 자매는 뒤늦게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에 대해 몹시 감격스러워했다. 하지만 이 조차도 사실은 ‘국가에서 알아서 발굴하여 포상한 게 아니라’ 장금실 여사의 아들(전태섭 씨), 그러니까 곽영선 지사의 손자가 수많은 증빙자료를 갖춰서야 가능했다고 했다. 똑똑한 손자가 아니었다면 팔순의 두 자매가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성 싶다. 곽영선 지사는 남편 장우근 선생과의 사이에 모두 2남 5녀를 두었는데 이날 기자가 만난 분은 장금실(80살), 장연실(76살) 자매였다.

 

“사실 저는 조카가 할어머니(곽영선 지사)를 독립유공자로 신청한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에게 ‘복잡하게 뭘 그런 고생을 하냐’고 말했던 적이 있어요. 그러나 조카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어린나이에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에 참여해서 1년여의 징역을 살고 나온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까마득히 몰랐을 거예요. 조카의 노력이 큽니다.” 곽영선 지사의 둘째따님인 장연실 여사의 말이다.

 

어머니(곽영선 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팔순에 이르는 두 자매의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순간 부끄러움도 치솟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늦고 지지부진했던 것일까?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을 뒷전으로 미뤄왔던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곽영선 지사가 살아생전에 이 찬란한 ‘훈장증’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크다. 아직도 이러한 집안이 쌔고 쌨을 것이란 생각에 안타까움은 더 커진다.

 

 

곽영선 지사는 만 열여섯 나이인 1919년 3월 24일,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에 태극기를 만들어 3월 27일, 신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에 뛰어들었다. 이 일로 2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최종적으로 8개월을 선고받고 1년여의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 곽영선 지사는 법정에서 "인도정의,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인민의 인성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참여한 이유는 일본에 반항하는 게 아닌,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해 일제시대 판사를 당혹하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곽영선 지사의 아버지 곽임대(다른이름 곽태종, 1885~1971)지사 역시 독립운동가다. “외할아버지는 미국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제2인자로 활약하신 분입니다. 외할머니는 안중근 지사의 5촌 고모인 안태희 여사이십니다. 외할아버지는 국내에서 활동하시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흥사단에 가입하여 큰활약을 하셨고 1920년 캘리포니아 윌로스지방에서 노백린 장군이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할 때 관여하는 등 57년간 미주에서 혁혁한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이후 57년간 가족들은 외할아버지와 떨어져서 사셨던 것입니다.”

 

 

곽영선 지사의 두 따님들은 외할아버지의 미주활동을 어제 본 듯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곽영선 지사 나이 12살때 아버지가 미국으로 독립운동을 떠나고 나니 고국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지사가 상해 뒷골목에서 배추 시래기를 주워 생활을 연명하다 생활고에 시달려 두 손자를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겪어야했던 궁핍과, 가족 간의 헤어짐의 역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처럼 망국의 한을 안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집안치고 온 가족이 한곳에서 함께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간 집은 많지 않다. 가장인 남편이 홀로 독립운동 최전선지에서 뛰게 되면 가족은 따로 남아 생활고를 해결해야한다. 이때 어머니인 여성은 가장 아닌 가장으로 자녀양육을 도맡았으며 본인 역시도 여러 애국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던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 집안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곽영선 지사 집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환경에서 곽영선 지사의 어머니인 안태희(안중근의사의 5촌 고모)여사는 딸들의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곽영선 지사는 여자도 배워야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어머니 밑에서 평양의 숭의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곽영선 지사의 아버지인 곽임대(다른이름, 곽태종) 지사는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일찍이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었다. 1909년 평북 선천에 있는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1년 11월,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을 기도했다고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이라고도 하며, 제1심 공판에서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하여 '105인 사건'이라고도 함. 1910년 무렵 신민회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있을 때 일제는 이를 막기 위해 여러 사건을 조작하여 애국계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이 때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으며 암살미수죄에 해당한다고 혐의를 뒤집어 씌웠고, 곽임대 지사 등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되었다.) 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곽영선 지사의 아버지 곽임대 지사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 지방에서 노백린 장군과 함께 한인 비행사양성소를 운영하면서 조국 독립의 기틀을 마련한 분이다. 그 뒤 57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한인단체의 대표로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족과 떨어져 홀로 활동해야했던 그 고초는 고스란히 가슴에 묻고 지내야했을 것이다..

 

 

“1970년 6월 17일, 나는 57년 만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다. 와 보니 내 조국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된 느낌이요, 마치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을 맛보게 했다. 말을 절반 밖에 못 알아 들을 정도로 모든 게 격변하여 내 자신이 이방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여기에 있고, 어언 환갑을 맞은 흥사단도 건재해 있으므로 차츰 정이 들어 비교적 화평한 말년을 보내게 된 것을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다.” - 재미투쟁반세기사 《못잊어 화려강산》 곽임대 지음, 가운데-

 

 

아버지와 딸인 곽임대(1993년 애국장 추서), 곽영선 부녀(父女) 독립운동가는 따님인 곽영선 지사가 올 73주년 광복절에 애족장 추서를 받음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어머니 곽영선 지사대신 훈장증을 대신 받아든 따님의 감회는 어땠을까?

 

 

 

“어머니의 고귀한 독립운동이 3.1운동 99주년을 1년 앞둔 올해서야 인정받게 되어 기쁩니다. 살아생전에 어머니께서 훈장증을 받으셨더라면.....여학생들이 저항하며 피흘려 되찾은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라고 말하는 두 따님 장금실, 장연실 자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곽영선 지사는 1980년에 돌아가신 뒤 화장하여 지리산 청학동 근처에 모시고 있는데 이번에 국가보훈처로부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며 두 자매는 ‘승인서류(경기동부보훈지청 보훈과 5408)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어머니 곽영선 지사의 이장은 10월 중순 무렵 좋은 날을 잡아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실 예정이라고 했다.

 

 

 

팔순의 두 자매가 고이 간직해온 여장부셨던 어머니 곽영선 지사의 흑백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는 모습에서 마치 살아생전의 곽영선 지사를 만난 듯 기자 역시 감격스러웠다. 늦었지만 두 따님과 99년 전 평양 숭의학교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곽영선 지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어 기뻤다. 특히 언니인 장금실(80살) 여사보다 건강이 안좋은 동생 장연실(76살) 여사의 건강이 어서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담을 마쳤다. 돌아오는 길 내내 두 자매가 자랑스러워하던 문재인 대통령 이름이 선명한 어머니 곽영선 지사의 ‘훈장증’이 뇌리에서 어른거렸다. 3.1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둔 터라 기자에게도 더 의미가 깊은 대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