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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중국 1950년 티베트 점령, 달라이 라마 1959년 탈출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9)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수색대는 라모 돈둡과 함께 라싸로 길을 떠나려 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 지역의 회교도 중국인 군 지도자 마부팡이 엄청난 금액의 몸값을 내기 전에는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고 떼를 써서 길을 떠나기 전까지 18달이란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라모 돈둡이 4살 때인 1939년 여름에 부모님과 형 그리고 수색대와 순례자들로 구성된 긴 행렬이 라싸를 향해 떠났다. 라모 돈둡의 행렬이 라싸에 도착하기까지는 3달이 걸렸다. 행렬은 수도에서 3km 떨어진 되구탕 평원에서 정부 고위 관료들의 영접을 받았다.

 

다음날 라모 돈둡을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는 의식이 포탈라궁에서 거행되었다. 포탈라궁의 새 주인이 된 라모 돈둡은 지혜의 바다라는 의미의 ‘텐진 갸초’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그를 쿤둔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의미는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외국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호칭할 때에는 존자(HH: His Holiness)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

 

즉위 뒤 달라이 라마는 기본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교육 과정은 불교학 박사 과정의 모든 승려들과 동일한 과정으로서 논리학, 티베트 예술과 문화, 범어(산스크리트어), 의학, 불교 철학이 포함되어 있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장개석 군대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면서 티베트를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로 편입하였다. 처음에는 지역 자치를 권하였으나 티베트인들이 호응하지 않자 중국은 1950년 10월에 4만 명의 군대를 보내어 8,500명에 불과한 티베트 군대를 물리치고 무력으로 티베트 동부지방의 도시 창두(昌都)를 점령하였다. 중국은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를 약 100km 앞두고 협상 대표단을 보낼 것을 독촉했다.

 

구심점이 필요한 티베트는 1950년 11월 17일 15살이었던 현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의 공식적인 최고 통치권자로 옹립하였다. 1951년에 달라이 라마는 협상 대표단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그러나 중국은 대표단을 강압하여 평화적인 해방을 위한 17개 동의안에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1954년에 티베트 지방 정부 주석, 그리고 전국 인민대표회의 티베트 대표를 역임하였다.

 

중국은 티베트인에게 자치권을 주지 않고 한족을 이주시키면서 티베트인들을 탄압하였다. 극심한 박해를 견디다 못한 티베트인들은 1959년 3월 10일 ‘티베트 독립’을 외치고 ‘한족을 몰아내자’라며 3만 명이 라싸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중국이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티베트인이 무려 8만 명이나 죽었다.

 

중국 군대가 포탈라궁을 포격할 계획을 미리 알아챈 달라이라마는 1959년 3월 17일 라싸를 탈출하였다. 달라이 라마는 병사의 복장을 한 채 게릴라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14일 동안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라다크를 통과하여 3월 31일 인도에 도착하였다.

 

(참고: 달라이 라마의 탄생에서 망명까지의 이야기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대원사 티베트박물관 누리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대원사 티베트박물관 누리집 들어가기

 

 

중국은 달라이 라마가 망명한 이후 티베트에서 종교 말살 정책을 추진하였다. 티베트인이 존경하는 불교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켰다. 항의하는 승려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탄압을 피하여 인도로 망명을 떠났다. <티베트에서의 7년>이나 <쿤둔>이라는 영화를 보면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1966년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홍위병들이 티베트에 침입하였다. 홍위병들은 6,000개의 절을 파괴하고 13개 절만 남겼다. 홍위병들은 불교 절을 때려 부수거나 감옥, 창고와 같은 곳으로 쓰임새를 바꾸었다. 티베트어로 된 경전이나 불상, 탱화 같은 종교 유물은 물론 티베트 전통의상, 신발 같은 공예품들은 소각되거나 압수되어 나라밖의 박물관(주로 미국과 유럽)으로 팔려 나갔다.

 

포탈라궁도 박살날 뻔했으나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편지를 보내 "이런 건물이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후에 봉건계급이 어떻게 농노들을 착취했는지 교육할 수 있다."라고 회유함으로써 겨우 화를 면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1975년부터 티베트에 한족 이주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2006년에 라싸까지 칭짱철도가 개통된 이후 한족이 몰려들면서 라사 주민 27만 명 가운데 절반은 한족이며 한족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현재 티베트 인구의 약 10%가 한족인 것으로 추정된다.

 

1978년에 시작된 등소평의 개방 정책은 티베트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티베트인들에게 자율권이 주어졌고 티베트어 교육도 허용되었다. 1982년에는 국가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티베트 지역에 외국인 출입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탄압은 계속되었다. 1987년에는 1959년 라싸 항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독립 항쟁이 발생했다. 이어서 1989년 라싸에서 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중국은 라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한 무차별 발포로 수천 명의 티베트인이 죽었다. 티베트인 억압 정책을 비난하는 외국의 정부와 인권 단체에 대해서는 내정간섭이라며 피해 나갔다.

 

한편,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라마는 처음에는 우타르 프라데시 주의 무수리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그러다가 1년 뒤인 1960년에 당시 수상이었던 네루의 협조로 인도 북서쪽 히마찰 프라데시 주의 히말라야산맥 기슭인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웠다. 달라이라마는 1963년 티베트 헌법을 기초하는 한편, 인도 정부의 지원으로 80개의 티베트 학교를 세우고 190개의 티베트 사원과 수도원을 세웠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종주권은 인정하되 티베트가 자치권을 갖는 것을 목표로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전 세계로 강연을 다니면서 비폭력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비폭력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달라이 라마는 1989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상위원회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 왔으며 폭력 사용을 반대하고 평화적 해결을 주장해온 점을 평가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달라이 라마는 수상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조국 티베트에 계시고 또 세계 각처에 나와 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특히 중국에 점령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비록 내가 멀리 망명 나와 있지만, 힘이 드는 삶에서도 중요한 것은 불법(佛法)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믿고 그 법에 따라 사신다면 내가 있고 없고에 상관이 없습니다. 특히나 중국 사람들을 미워하지 마시고 어떤 물리적 가해로써 피해를 주지 마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들 중국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곧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치 않습니다. 끝까지 자비심으로 참아내면서 먼 훗날 다시 모여 함께 살 때까지 부처님께 근거를 둔 법에 의한 그런 삶으로 살아가기를 거듭 당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