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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 ’임병극 선생‘ 꼽아

봉오동 전투 승리로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리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임병극(1885~미상) 선생을 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

 

선생은 1885년 평안도에서 출생하였으며 1917년 고향을 떠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일원으로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대한국민회가 만든 항일무장활동 기관인 국민회군의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독립전쟁의 맨 앞에서 활동했다.

 

국민회군과 함께 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무장활동을 펼치던 독립군단들은 효과적인 항일전을 위해 1920년 5월 22일 북간도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탄생시켰으며,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 유격대는 수시로 국내진입 전쟁을 펼쳐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유격대는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는 큰 전공을 세운 뒤, 6월 6일 대한북로독군부 주력부대가 주둔해 있는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으로 향했다. 봉오동은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형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가 하나였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요새지로 오늘날에는 그 지형의 이점을 살려 봉오저수지가 축조된 곳이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사령관의 공격 신호탄에 따라 일제히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며, 대한북로독군부 피복과장이면서 국민회군의 2중대장이었던 임병극 선생도 부하 독립군을 독려해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봉오동 전투 승리에 이바지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결과에서 일본군 사망자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뿐으로 독립군의 완승이었다. 이로 인해, 봉오동전투는 침략자 일제에게 한민족이 기필코 조국광복을 달성하리란 증표를 보여준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선생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여 전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1921년 안도현에서 의용대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의 기관을 기습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연해주 민족운동계 및 고려혁명군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선생은 북간도에서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1924년 2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 동안 적기단(赤旗團)ㆍ북로군정서의 인사들과 회합을 했다. 이후 선생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돈화(敦化)와 연길을 왕래하며 지하활동을 이어갔다. 선생의 이 같은 활동은 중국군에 포착되어 1924년 9월 연길현 숭례향 대명월구(大明月溝)에서 부하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