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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충신일까, 무능한 신하일까?

[고양문화통신 4] 고려의 마지막 장수 최영 장군 잠든 대자산에 가다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고려시대 왜구 퇴치의 최고 장수를 들라하면 누구든 최영장군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최영장군은 고려 충숙왕(1294-1339)이 집권하던 1316년에 사헌부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새기며 성장했다. 최영장군은 훗날 이성계에게 살해된 우왕(1365-1389)의 장인으로 우왕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오르면 무덤 안내 팻말이 있다

 우왕 4년(1378)에 왜구가 착량(窄梁, 지금의 강화)에 모여 승천부(昇天府)를 침입하니 최영장군은 이성계와 함께 적을 무찔렀는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서훈되었으며 우왕 6년에는 해도도통사를 겸하여 왜구방비에 힘썼다. 그러나 우왕은 가끔 엉뚱한 데가 있었다. 온나라에 왜구가 날뛰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한 가운데서도 놀러 다닐 생각을 했다.

 

   
▲ 무덤 입구 계단 오르기 전에 안내글

그러자 최영이 간하기를 “요즘 기근이 자주 들어 백성이 살 수 없는 형편이며 또 곧 농사철인데 분별없이 왕께서 유람을 즐겨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왕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 충숙왕도 유흥을 즐겼는데 왜 나에게만 즐기지 못하게 하는가?” 그러자 최영이 답하길, “선왕 때에는 백성이 편안하고 시절도 풍년이어서 유흥도 할 수 있었으나 오늘에는 그것이 옳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라는 말로 왕도에 대한 충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왕은 용수산에 놀러가 술에 취해 말을 타다 떨어졌다. 최영이 눈물을 흘리면서 간하기를, “충혜왕은 색을 좋아하였으나 반드시 남이 알지 못하는 밤에 하였고, 충숙왕은 놀기를 좋아했으나 반드시 시기를 보아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게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왕께서는 분별없이 놀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였으니 제가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대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우왕이 답하길 “이제부터 고치겠다”고 하였다는 일화에서 최영장군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우왕 14년(1388) 대륙의 정세가 변해 명나라가 일어나고 원나라가 쇠퇴하게 되었는데 명은 철령위를 설치하여 전진기지로 삼고자 하니 우왕은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므로 최영은 이를 추진하여 조민수와 이성계를 출전시켰으나 그만 위화도에서 이성계 일파가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가고 최영은 고봉(지금의 고양)으로 유배의 길을 걷게 되고 끝내는 73살의 나이에 주살 당한다.  

최영장군과 이성계의 운명적인 마지막 만남의 장면이 태조실록 1권 총서 85번째 기록에 나와 있다. “우왕은 영비(靈妃)와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곽충보(郭忠輔) 등 3, 4인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내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니, 최영은 두 번 절하고 충보(忠輔)를 따라 나왔다. 태조(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대의(大義)에만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면서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에 유배(流配)시켰다.” 

   
▲ 무덤에 오르기 전 돌계단 입구에 문중이 세운 한자로된 묘비명(왼쪽), 한글로 된 것은 돌계단을 오르면 무덤 앞 쪽에 있다.

이성계가 정말 측은지심으로 눈물을 흘렸는지는 알 수 없다. 태조실록은 물론 모든 역사서가  ‘승자의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친 장수로, 고려의 충신으로 이름을 떨친 최영장군은 무속인들 사이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추앙 받아왔다. 《고려사절요》등에 보면 그의 제삿날만 되면 그가 처형당한 개풍군 덕물산에는 전국의 무속인들이 모여 일정한 제사를 모시고 제례가 끝나면 성계육(成桂肉, 이성계의 고기)이라 불리는 돼지고기를 돌려먹었다고 할 정도로 최영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지금도 각지에서 여러 형태의 제례행위에서 표출되고 있다. 

부산 무민사에서는 최영 장군 애국혼 기리는 '향사'를 해마다 봉행하고 있으며 충남 홍성과 고양시에서도 최영장군의 추모제와 굿이 열리고 있다. “나에게 탐욕이 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요, 결백하다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져간 최영장군 봉분은 풀이 나지 않는 적분(赤墳)이었으나 최근에는 그의 문중에서 봉분에 떼를 입혀 지금은 잔디가 잘 자라고 있다. 이에 앞서 1701년 (숙종) 고양군수인 김유가 기이한 꿈을 꾸고 사초를 한 뒤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최영장군 무덤을 처음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일로 고양시사를 집필 중인 때였다. 이번에 오랜만에 신록이 우거진 최영장군 무덤을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무덤 입구에는 전에 없던 예쁜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었고 붉은 철쭉꽃이 무덤에 이르는 돌계단 주변에도 곱게 피어있었다.

  

   
▲ 안쪽에 아버지 최원직의 무덤이 있고 앞쪽에 최영장군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무덤이 있다. 앞뒤로 묘비석이 잔뜩 있으나 한자인데다가 마모로 인해 어느 무덤이 최영장군 무덤인지 모르므로 무덤 입구 안내판에 2기의 무덤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최영장군 가신지 어느덧 올해로 625년을 맞는다. 덧없는 세월의 빠름 속에서도 고려의 지조와 절개를 지킨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자 무덤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으니 역사의 질긴 실타래의 끝이 아직은 길게 남아 있음이 다행스러웠다. 

아쉬운 것은 최영장군 무덤에 올라보면 안쪽에 무덤 1기와 앞쪽 무덤 1기가 있어 어느 것이 최영장군 무덤인지 아리송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안쪽 무덤은 아버지 최원직의 무덤이고 앞쪽 무덤은 최영장군과 부인 문화유씨 합장무덤이다. 이러한 내용을 안내판 등에 한 줄이라도 적어주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더보기> 

“우왕은 최영장군의 사위였다.”

우왕은 고려의 제32대 왕(재위,1374~88)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신돈(辛旽)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출생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유배되자 당시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전에 신돈의 집에 갔다가 아름다운 부인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공민왕의 아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돈이 죽자 어린 우왕은 궁중으로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으며,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을 얻어 1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부터 북원(北元) 및 명(明)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순탄하지 못했고, 왜구(倭寇)까지 창궐하여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본성이 총명하여 처음에는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으나 점차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宦官)이나 악한 소인배[惡少輩]들과 어울려 사냥이나 유희에 빠져 정치적 지지기반도 잃고 말았다.  

당시 이성계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고려사》우왕의 세가를 열전(列傳) 반역전(叛逆傳)의 신우전(辛禑傳)에 넣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이성계 등이 조선 건국을 합리화시키려는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우왕의 부인인 영비 최씨는 최영장군의 딸로 1388년 3월에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시기는 최영과 우왕의 요동정벌이 감행되던 때로 당시 우왕은 권력의 핵심에 있던 최영의 보필이 절실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자 영비도 우왕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이듬해 강릉으로 유폐 된뒤 그 해 12월에 우왕이 살해되자 영비는 우왕의 시체와 함께 지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태조실록에 전하는 바와같이 아버지 최영장군은 사위 우왕과 딸 영비와의 마지막 인사를 팔각전에서 나누고 있을 때 이성계의 부하에게 끌려 나가게 되어 부녀지간은 영영 만나지 못한 채 고려의 멸망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안내>

* 주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 (경기도 기념물 제 23호)
 
덕양구 관산동 필리핀 참전탑에서 대자동 방향으로 2키로미터 쯤에 있으며 내비게이션을 찍어 다녀왔는데 무덤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무덤 입구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400여 미터쯤 호젓한 산길을 걸어가면 무덤안내판이 나오고 돌계단을 오르면 최영장군 무덤(부인과 합장)과 아버지 최원직 무덤이 위 아래로 나란히 있다.  

 
** 이윤옥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고양"에 둥지를 튼 지도 어언 17년째이다. 문화행위가 점점 껍데기와 이벤트성으로 흘러가는 시대일수록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역사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글쓴이는 2006년에 편찬된 고양시사7권에 집필위원으로 참여 한바 있다. 그때 속속들이 소개하고 싶은 고양문화와 역사이야기를 따로 뽑아 두었는데 이제 그 이야기보따리를 얼레빗 신문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