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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신임이 컸던 고양 8현 모당 홍이상

[고양문화통신 11]

[그린경제=이윤옥 기자]  청정 (加藤淸正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에 앞장선 가토기요마사를 말함)의 일에 대해 승지의 의견은 어떠한가?” 선조의 질문에 홍이상이 답하길, “오랑캐들이란 짐승과 같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당당하면 절대로 애걸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말한 것을 보면 너무나 흉악스럽습니다. 우리나라로서는 그들이 중국군과 서로 버티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무슨 조처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강화만은 반드시 이루어서는 안 됩니다. 대의(大義)로 말하면, 중국의 입장에서는 혹 그렇게 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나라로서는 만세토록 기필코 갚아야 할 원수들인데 어떻게 그들과 강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도 따를 수 없는 일입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27(1594) 41) 

   
▲ 모당 홍이상 무덤

모당 홍이상(洪履祥,1549-1615)은 선조임금으로부터 신임이 컸던 인물로 고양 8(8) 가운데 한 분이다. 고양시 성석동에는 선생의 무덤과 신도비가 서있는데 신도비에 비친 모당 선생의 인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공은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우러났다. 자식의 분분을 지켜 하나같이 성인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는 마루에 올라가 따뜻한 지 추운 지를 여쭈었고 직접 음식을 올리고는 물러나와 독서를 했다. 아버지 찬성공이 만년에 중풍에 걸리자 병석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약을 올리며 의원을 보면 반드시 인사하고 울면서 말을 하였다. 옷을 입고 허리띠를 풀지 못한지 십여 년 만에 마침내 평상으로 회복되어 건강하게 있다가 천명대로 졸하였으니 사람들이 지극한 효심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중략)

평생 말을 거칠게 하거나 얼굴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서 비록 재앙과 환난으로 다급한 때나 일이 분잡하여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도 언어와 기색이 온화하고 의젓하고 처리하는 것이 밝고 자세하였다. 겸양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았으나 옳고 그름과 공사(公私)를 구분함에 이르러서는 한마디 말이라도 옛사람의 도리를 인용하니 그 굳센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포의로부터 재상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그 처신하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것에 처음부터 한 마음을 지켜 변한 적이 없었다. 항상 재능을 드러내지 않는 데 힘을 쓰고 남이 알아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에서의 훌륭한 행실은 비록 이웃이라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 모당 홍이상 신도비, 여기엔 홍이상 선생의 인품과 학식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선생의 신도비에는 그의 인품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이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당 선생은 당대 최고의 학자요 최고의 강관(講官)을 역임한 사람이다. 강관이란 임금에게 경전을 지도하는 직위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식이 아니면 어려운 자리였으니 모당의 높은 학식을 짐작 할만하다.  

특히 강관 중에 최고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예조판서를 아홉 번이나 지내고 40년간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랐던 모당은 조선의 4대 문장가인 이정구조차 이러한 평을 받지 못했을 만큼 당대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분이었다. 성석동에 있는 모당 홍이상 선생의 신도비는 조선의 대 문장가인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 1635)선생이 썼다. 

그러나 모당 선생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여 죽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25살에 사마시험에 합격했지만 그는 입신출세를 재산축적의 기회로 삼지 않고 도()의 완성에 두었다고 전한다. 그야말로 선비이자. 더욱이 모당은 남다른 효성을 보였는데 3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상복을 벗은 뒤에도 사모하는 정을 그치지를 않아 자신의 호조차 모당(慕堂)으로 짓게 된다. 

   
▲ 모당 홍이상 무덤 안내판

아침이 되어 얼굴을 들어보니 / 마음을 쏟아 늦으막이 어버이를 맺으니 / 어찌 한 이별에만 놀라리오 / 서쪽 성곽에 꽃다운 이웃이 함께 하리라이는 아버지를 그리며 모당이 지은 시이다. 

모당은 선조 6(1573) 사마시를 거쳐 157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이래 정언(正言수찬(修撰병조정랑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그 후 대사성·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선생은 61살 되던 해인 홍문관부제학 시절에 나라가 불행히도 사론이 둘로 나뉘어 뿌리가 없고 이치 없는 말은 붕당에서 싹트니 수십 년 이래로 고질이 되어 분열이 이미 심하고 상호 기울여져 모이고 있다. 국사가 날로 그릇되고 공의가 흔적도 없어 이백년의 종사가 날로 위태로운데 나아가 수습할 수 없는 것은 실로 안타깝다.”며 걱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의 원로들도 국정 운영에 참여하여 함에도 배회만을 하고 있음을 질타하고 있다. 나라에 어른 없음을 한탄하던 모당 선생의 우려는 모당 가신지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느낌이다. 

고양시에서는 향토문화연구회(회장 안재성)와 문봉서원의 주관으로 모당 홍이상 선생을 비롯한 고양팔현 추향제를 해마다 열고 있다. 문봉서원은 1688(숙종14) 일산동구 문봉동 빙석촌 입구에 있던 서원으로 1709(숙종35)에 사액 받은 고양 최초이자 대표적인 서원이며, 연천군의 임강서원과 함께 걸출한 인재를 많이 길러냈던 곳이다.  

이곳에는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던 모당 홍이상,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 사재 김정국, 복재 기준, 추만 정지운, 행촌 민순, 석탄 이신의, 만회 이유겸 등 고양팔현이 배향되어 있었는데 1865(고종2)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으로 없어져 지금은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윤사순 교수가 고양팔현이 아니라 조선8현이라고 해야 맞다라고 할 정도로 고양 8현 한분 한분은 중심 잡힌 철학과 나라 경영에 대한 투철한 사상을 지녔던 분들이다. 

   
▲ 모당 홍이상을 모시는 충주 하강서원 편액

   
▲ 모당 홍이상을 모시는 충주 하강서원 전경

한편 모당 홍이상 선생을 기리는 곳이 고양시 말고도 있는데 충주의 하강서원이 그곳이다. 하강서원(荷江書院)은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 있으며 사당과 삼문만이 남아있던 구 건물을 이곳 유림들의 힘으로 1964년 복원하였다. 사당은 전면 3, 측면 1간반으로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92년에는 사당의 오른쪽에 서원을 크게 복원하여 하강서원이라 현판을 달았다. 남한강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하강서원으로 가는 조붓한 길에는 감자꽃이 한창 피어 하지를 앞둔 튼실한 감자밭을 보는 풍경이 정겨웠다. 

글쓴이의 조상도 아니련만 고양 8현의 한분인 모당 선생의 사당이 충주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보고 싶어 달려갔던 것은 왜 일까? 무더운 여름, 말없이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다보며 충주지역에서 모당 선생을 기리던 후학들의 애절한 마음을 새겨보면서 하강서원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