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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최고의 절 센소지(浅草寺)서 느끼는 백제의 향기<1>

서울엔 조계사, 도쿄엔 센소지(浅草寺)

[그린경제 = 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아사쿠사는 옛도시의 분위기를 간직한 유서깊은 절이 있는 도쿄에서 가장 전통적인 거리 입니다. 수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아사쿠사간논절(浅草觀音)과 아사쿠사신사(浅草神社)는 물론 주변 지역에까지 아사쿠사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사쿠사에서는 에도시대 서민 경제와 오락의 중심이었던 옛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또한 현재 이 시대 서민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도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이토쿠(臺東區) 관광과에서 만든 <아사쿠사 일대와 센소지>에 대한 한국어판 안내문은 일본어를 몰라도 아사쿠사 일대를 편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친절한 한글로 되어 있으며 아사쿠사 역 근처 여행안내소에서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를 도쿄의 인사동거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인지 인사동 골목의 아기자기한 상점가인지 헷갈리는 곳. 절 입구에 나란히 나있는 나카미세(仲見世, 상점가)는 언제나 관광객들로 바글거린다. 이곳이 관동 최고의 관세음신앙지 센소지(浅草寺)다. 센소지는 가장 오래된 절을 뜻하는 최고(最古)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절로도 최고(最高)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도쿄 시내를 순환하는 JR 야마노테선(山手線)을 타면 곧바로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접근성이 좋은데다가 관동 제일의 유명한 절이다 보니 절은 언제나 북새통이다.

 

  

▲ 아사쿠사 간논(浅草觀音)으로 널리 알려진 센소지 본당


아사쿠사역에 내려서 절 입구 표시를 보고 걸어 나오면 바로 마주치는 커다란 가미나리몽(雷門)은 센소지의 대문인 셈인데 정식명칭은 후라이몽(風雷門)이지만 통상적으로 가미나리몽이라 불리운다. 이 문은 후지산과 함께 일본을 상징하는 풍경의 하나로 각종 여행 안내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높이 3.9m, 지름 3.3m, 무게 700kg에 달하는 거대한 등으로 오른쪽에는 풍신상, 왼쪽에는 뇌신상이 자리한다. 센소지의 상징이 되어버린 가미나리몽 앞은 언제나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빈다. 금발의 서양인 모습도 눈에 띄고 흑인들도 있다. 중국어도 들리고 한국어도 예사로 들릴 만큼 관광객들에게 사랑 받는 곳이다.







 

 

  
         ▲ 일본을 상징하는 풍경의 하나로 소개되는 센소지 정문 가미나리몽

 센소지에는 유명한 관음상이 있는데 이를 센소관음이라 하지 않고 “아사쿠사간논(浅草観音)이라고 부른다. 센소지가 자리한 땅이름 센소는 얕을 천(浅), 풀 초(草)를 쓰는데 이를 소리로 읽으면 “센소”로 발음하며 “아사쿠사”는 뜻으로 읽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의 “대전(大田)이 소리로 읽는 것이고, “한밭”은 그 뜻인 것과 같은 이치다. 지명에서 보듯 이곳은 그 옛날 풀밭이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 아니라 자잘한 풀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던 초원지대로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한국계(韓國系)였다.


 《속일본기》에 “고구려인 1,799명을 오늘의 관동지방인 무사시국에 이주 시키고 이곳에 고구려군(高句麗郡)을 설치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서기》 천지 5년 겨울조에는 (天智5年冬条)“백제 남녀 2,000명이 동국(東國)에 살았다. 스님과 속인을 가리지 않고 3년 동안 정부로부터 녹읍을 내려받았다.”는 내용이 보이며 천무 13년 5월조(天武13年5月条)에는 “귀화한 백제 스님과 속인 23명을 무사시국에 옮겨 살게 했다.” 또한 지통 12월조(持統12月条)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 62명을 받아들였다.”라는 기록을 볼 때 1,300여 년 전 관동지방인 무사시노국에는 신도시 개발의 꿈을 안고 옮겨와 정착한 한반도인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관동지방은 사가미국(相模國), 무사시국(武蔵國), 히다치국(常陸國)을 포함하여 8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오늘날의 도쿄도(東京都)를 포함한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사이타마현(埼玉県)등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야마토정부의 관동개발 프로젝트 제1진으로 도착한 고구려인들은 풍부한 물과 초원지대를 이용한 대규모 목장을 경영하면서 관동의 세력권을 키워나갔다.


 헤이안 중기의 법전인 《연희식,延喜式)》에 보면 무사시국에 3개의 목장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히노구마목장(檜前牧)이다. 또한 일본《지명사전,地名辭書》에 따르면 무사시국 풍도군 점방향조 (武藏國 豊島郡 占方鄕条)에 “이곳은 지금의 천초구(淺草區)로 예전엔 히노구마목장(檜前牧)이 있었다.”라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사쿠사 절터는 예전에 목장지였을 것으로 단희린 교수는 그의 책 《일본에 남은 고대 조선(日本に残る古代朝鮮), 1978》에서 밝히고 있다.


  

▲ 백제인 히노구마형제가 어망에 불상을 건지는 그림


  

▲ 백제인 하지씨에게 불상을 가지고 가서 보이는 장면


 또한, 그는 현재의 센소지 관음당 동쪽 수신문(隨身門) 밖을 “마도(馬道)”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예전에 히노구마 목장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히노구마 목장이란 히노구마 씨의 목장이며 이들은 일찍이 관동으로 이주하여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센소지는 히노구마씨의 수호불을 본존에 모시고 공양했을 가능성이 크다. 55센티의 작은 불상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비불(秘佛)로 이는 히노구마 일족의 수호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히노구마란 성씨가 센소지와 관계가 있음은 센소지 연기(緣起)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아사쿠사간논 곧 센소지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92년에 펴낸 가마쿠라 막부의 역사책 《아즈마카가미(오처경, 吾妻鏡)≫로 “후백하법황(後白河法皇)의 49재 날에 센소지의 세 스님이 참가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 1949년대 무렵의 센소지


 그러나 구체적인 절의 유래는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林羅山)이 쓴《등원성와문집, 藤原惺窩文集》과《본조신사고, 本朝神社孝》가 전해지는데 이에 따르면, “서기 628년 스미다가와, 隅田川)에서 고기를 잡던 히노구마노 하마나리, 다케나리 형제는 평소처럼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으나 그날따라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다. 여러 번 그물을 던진 끝에 어망에 걸려나온 것은 사람모습의 인형(불상인지 모르고 인형으로 알고 있었음)이었다.


형제는 이 이상한 물체를 그대로 바다에 던져 버렸으나 몇 번이고 그물에 걸려 나오는 것을 이상히 여겨 건져서 당시 향토문화인(郷土の文化人)인 하지(土師中知) 씨에게 가지고 가서 내보였다. 그러자 하지 씨는 이것이 성관세음보살상(聖観世音菩薩の尊像) 이라며 깊은 믿음으로 공양했다. 어부형제도 이 불상이 중생의 모든 소원을 현세에 이뤄주는 “현세이익불(現世利益仏)”임을 알고 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열심히 기도한 결과 그 소원을 이루었다. 한편 하지씨는 이후 삭발하고 출가하여 자기 집을 절로 고쳐서 이 불상을 모시고 마을주민을 가르쳐 이끄는데 일생을 보냈으며 이것이 센소지의 시작이다”라고 나와 있다. 


  히노구마 형제는 그물에 걸린 불상이 무엇인지 몰라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들이 불상을 건진 해가 서기 628년이며 이 시기는 백제에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공인된 지 약 76여 년이 지난 시기다. (538년과 552년 설이 있음) 처음 불교가 전해졌을 무렵에는 주로 황실불교였기에 일반서민에게까지 불교가 신앙으로 정착되지 못했으며 당시 서울인 나라(奈良)에서 먼 관동의 아사쿠사 동네 사람들이 불상을 구경했을 리가 없다.


이를 입증하듯 어부 형제는 처음 대하는 불상이 신기해서 원로인 하지 씨한테 이 불상을 가지고 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왜 하지 씨였을까? 동네에 불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하지 씨밖에 없었던 것일까? 참으로 재미난 일이다. 왜냐하면, 어부 형제가 불상의 정체를 물으러 간 하지 씨도 한국계 인물이기 때문이다. 불상을 건진 사람도 한국계이고 마을 원로도 한국계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1,400여 년 전 관동의 아사쿠사 동네에 한국계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土師) 씨는 어떤 인물이기에 히노구마 형제가 불상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었던 것일까?

 수인(垂仁) 천황의 황후가 죽었을 때의 일을 속일본기《續日本紀》 수인(垂仁32년)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까지 고분(古墳)에 산 사람을 순장시켰던 수인천황은 이를 금지하는 대신 황후 장례를 어떻게 할지 군신들에게 의논했는데 이때 하지(土師) 씨의 조상인 노미(野見宿祢) 씨가 조정에 초청되어 조언을 해주었다.


  

▲ 1834년의 금룡산 센소지 전경, 하세가와(長谷川雪旦)그림


그는 산 사람 대신 사람형태의 인형과 말을 무덤에 묻으라고 하면서 손수 이를 만들어 천황에게 바쳤는데 천황이 몹시 기뻐하며 그 공적을 칭찬하여 노미(野見) 씨에게 흙의 스승 곧 기술자란 뜻의 하지(土師)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흙의 스승”이란 “흙의 연금술사”를 뜻하는 것이리라.


이는 단순히 흙으로 만든 말과 사람 형상만을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라는 성을 하사받기 전인 노미(野見)라는 성씨는 석재를 가공할 때 사용하는 도구인 “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는 곧 석재를 다루는 기술자를 뜻한다. 노미 씨 곧 하지 씨는 고대 건축과 조각에 뛰어난 장인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속일본후기, 続日本後紀)》에도 하지씨(土師氏)는 노미씨(野見宿禰)의 후예이며 이즈모계(出雲臣系)로 설명하면서 아메노(天穂日命)→다케노(建比良鳥命)→노미(野見宿禰) →하지(土師氏) 관계로 보고 있다. 하지 씨는 일본의 50대 천황인 간무를 낳은 백제여인 고야신립의 외가 가문이다. 또한 《속일본후기》에는 무사시국(武蔵国, 지금의 관동)의 히노구마(桧前舎人, 檜熊으로도 씀)씨는 하지 씨와 같은 조상으로 히노구마(檜熊) 씨인 어부 형제는 이들과 동족인 것으로 나와있다.


 지금도 풍수와 관련하여 무덤을 정한다든지 이사나 결혼식 때 좋은 날짜를 잡는 일이 일반화 되었지만 당시에는 지금의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관(地官)과 일관(日官)등은 중요한 존재였다. 천황이 아무나 불러서 황후장례를 상의하겠는가? 그런 엄청난 자리에 초청된 사람이 하지 씨였다. 하지 씨처럼 장례나 혼례에 관련된 날짜를 잡아 주는 사람을 고대에는 히지리(日知り)라고 했다.


이는 해를 아는 자로서 곧 태양의 사제(司祭), 주술자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전래 된 이후 일본에서는 “히지리(日知)”라는 한자 대신에 “성(聖)”이라는 한자를 쓰게 되었고 좀 더 후대로 가면 학덕이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아사쿠사의 하지 씨는 동네의 사제이자 원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상을 가지고 하지 씨를 만나러 간 어부 히노구마 형제는 어떤 사람들일까? 단희린교수는,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에 “히노구마(檜前, 檜熊) 씨는 본래 야마토(大和國, 高市郡) 히노구마마을(檜前鄕)에 정착한 한씨(漢氏, 백제계) 도래인으로 <우경제번상(右京諸蕃上)> 한조(漢条) 에 “히노구마스구리(檜前村主)는 백제계의 고조(高祖)”임을 들어 센소지 유래에 나오는 어부형제는 이들의 후손으로 보고 있다.


일본 문헌 속에 자주 등장하는 “漢氏, 漢系”라든지 “秦氏” 등은 중국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국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우에다박사는 (上田典昭) 《일본의 조선문화(日本の朝鮮文化)》에서 일찍이 밝힌 바 있으며 특히 그는 “아야씨, 漢氏”는 백제계이며 “하타씨, 秦氏”들은 신라계로 추정하고 있다.

 

이야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일본한자는 구자체로 썼씁니다.  

 

관동 최고(最古)의 절인 센소지는 한반도계 출신인 히노구마 형제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들이 바다에서 건진 금동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 센소지이며 아사쿠사 신사는 이들 어부 형제와 마을 원로 하지 씨를 모신 사당이다. 또한 센소(浅草)라는 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당시 푸른 초원 지대로 말을 기르던 곳이다. 목장을 경영하며 경제권을 장악하여 야마토정부의 관동개발 프로젝트를 완성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한반도 출신자들로 그들은 오늘의 관동지방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이기도하다. 이곳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참고로 이 글은 2010년 1월에 답사를 마치고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