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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서슬 퍼런 신군부 날선 칼날 앞에서도 꿋꿋했던 정주영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 (1915~2001) <30>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한 대기업의 회장이 느닷없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울먹이며 자기 그룹의 모든 기업을 정부에 헌납하고 기회를 준다면 전문경영인으로 남겠다는 발표를 하여 경제계는 물론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때는 1979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 등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12·12 사태가 일어난 뒤였다. 이름하여 신군부라고 부르는 이들은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국정 전반에 걸친 실권을 장악하였고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강경 진압하였음은 물론 순수한 광주시민들의 민주항쟁을 피로써 진압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군부는 정치, 사회적으로 그 기반이 약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권력 강화를 위해한 힘을 남용했다. 권력강화란 말 이면에는 강자로부터 유린당한 약자의 인권유린이 존재하는 법으로 신군부의 권력강화 작업역시 많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가장 대표적인 인권유린 작업이 악명 높은 사회정화작업이다. 1차 희생양은 240여 명이나 되는 국가 고급 공무원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단지 고위 공무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내 몰려야 했다. 이러한 행태는 민간단체까지 그 손길을 뻗쳐 신군부는 인원을 지정하여 숙청하도록 했다. 

고분고분하지 않는 정주영 회장 연임 저지하려는 신군부 

이러한 신군부의 무리수에 한국의 유일한 자율적 민간경제단체인 전경련도 창설 이래 가장 큰 시련의 한때를 맞이하게 된다. 전경련 사무국 역시 그 압력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급기야 신군부는 경제논리에 관계없이 중공업 분야에 대한 투자조정을 강행하였다. 이는 말이 투자조정이지 사실상 강제로 민간 기업을 빼앗아 공사화하거나 통폐합하는 내용이었다. 주요기업 그룹의 계열사 166개 기업들을 1984년까지 강제 정리하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재계는 국제경쟁력 강화와 자유시장 논리에 어긋난다는 주장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신군부가 아니었다. 대기업 회장의 라디오 발언도 그런 상황에서 압력을 견디다 못해 나온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정주영의 전경련은 신군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다. 이 때 정주영 회장은 경영자총협의회에서 주관하는 한 업계간담회에서 한국이 사회주의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당황한 경총 사무국에서는 당국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정 회장의 발언이 절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정주영의 저항에 그대로 있을 전두환 정부가 아니었다. 정부는 차기 전경련 총회에 앞서 전경련 회장 추대 과정에 개입하여 신군부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주영 회장을 물러나게 하고 그들에게 협조할 수 있는 인사로 바꾸라고 강요했다. 신군부 정부는 이미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 4단체 가운데 전경련을 뺀 대한상의,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장을 정부의 입맛에 맞게 고분고분한 사람들로 바꾸어 앉힌 뒤였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 일각은 물론 다른 경제단체를 부추겨 전경련 무용론과 경제단체 통폐합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하였다. 또 언론 등 전 사회의 모든 단체장들을 모두 갈아치우고는 힘을 과시하고 으름장을 놓아가며 정주영의 전경련과의 팽팽한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나라안팎의 여론과 특히 국제 경제계를 의식하여 정주영 회장을 임기 중에 끌어내리지는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마침 정회장의 전경련 회장 2차 연임 임기가 끝나는 1981220차 전경련 정기총회가 다가왔다. 신군부에게 껄끄럽기 그지없는 정주영 회장을 자기들 뜻대로 바꿔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들은 고분고분한 사람을 골라놓고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정 회장은 정기총회의 가장 큰 사안이 우선 본인 자신의 직접적 거취문제여서 그냥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이 아니라 전경련이 앞으로 대정부 관련 사업을 펼쳐 나가는데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기총회가 있는 날 아침 정 회장은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놓고 그날 있을 전경련 총회에서 전경련 회장직 연임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전한 다음 전경련 총회장으로 향했다.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한편 신군부 정부 측에서는 정주영이 물러나지 않으려 할 것을 대비해 단단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정 회장이 정말 바뀌는지 확인하기 위해 관련 경제부처의 관리 두 명을 전경련 총회에 파견하여 지켜보도록 하는 조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민간단체의 총회에 정부 관료가 지켜본다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 국가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니던가? 총회의 신임 회장 추대 회순에 따라서 드디어 정 회장이 연임을 고사하는 말을 했다. 새 회장에 추대되는 인사의 이름이 거명되고 관례대로 추대에 동의하는 박수절차가 끝나면 새로운 회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때 평소에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던 롯데그룹을 대표하는 유창순 회장이 긴급 의사진행 발언에 나섰다. 

롯데그룹 유창순 회장, 정부 뜻대로 회장이 바뀌면 안 돼  

나도 전경련 회장직을 꼭 정주영 회장이 계속 맡아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수민간 자율경제단체인 전경련의 회장직과 관련한 배경과 과정에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경련이 이러한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정부의 뜻대로 회장이 바뀐다면 이는 민간경제계를 대변하는 자율단체로서 전경련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전경련 회장에 추대되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 문제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내내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던 총회장은 순간 유창순 회장의 발언에 동의의 박수 소리로 뒤덮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회장의 연임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서슬이 퍼랬던 당시 분위기를 볼 때 일종의 반란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안팎 언론에 공표되어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사안을 신군부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으로 나라를 뒤흔들던 신군부였지만 되돌리기에는 그들이 감당해야할 역풍의 부담이 너무 컸었기 때문이었다. 

뜻 관철하지 못한 신군부, 엉뚱한 임원들에게 화풀이 

이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커다란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민간 자율 경제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지켜 낸 전경련의 커다란 역사의 장이 보기 좋게 마무리 되었다. 당혹감과 분노에 치를 떨었을 정부 측에서는 엉뚱하게 전경련 사무국 임원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회장 추대과정의 이변상황을 그들이 물밑에서 모의한 것으로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벌한 신군부 당국도 꼬투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이미 50~60대가 되어버린 사무국 임원들의 병역미필 여부를 캐는 일이었지만 그것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 될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의 명언으로 꼽히는 것 가운데는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일하는 한 내 권한을 양보 안 하는 대신 다른 이에게 책임전가도 안 한다.”가 있다. 바로 정주영이 전경련 회장을 맡은 동안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던 좌우명이 아니었을까? 서슬 퍼런 신군부에게도 정당한 것이 아니면 머리를 숙이지 않는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 그래서 전경련은 그의 회장직 연임을 간절히 바란 것 아닐까? 당시 시퍼런 신군부의 칼날 앞에 자진해서 기업을 내놓은 대기업 회장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정주영이야 말로 진정 소신 있는 지도자였고, 전경련 회장으로 절대 필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