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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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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안사 삼층석탑(보물 제223호)

피안에 들고 싶다면 귀를 열어라 [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5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도피안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피안(彼岸)에 들고 싶다면 화개산 도피안사(到彼岸寺) 가자 깨달음의 언덕을 언제쯤 올라보나 열반은 가까이 있다 “귀를 열어라”고 탑은 말한다 도피안사는 피안의 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 싶은가. 그런 이상적인 경지가 꿈처럼 요원하다면 남한의 최북단 철원 화개산 도피안사에 가자. 한국 전쟁 이후 군에서 재건하였다는 이 절의 〈사적기(寺蹟記)〉엔 재미있는 사연이 전한다. 당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여 철원에 있는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암소 등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 불상이 없어져 찾아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어 865년(신라 경문왕 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현재는 군에서 파견된 군승과 주지 김상기가 관리하고 있지만, 휴전선 북쪽 민통선 북방에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3층석탑(보물 제223호)은 치열한 격전지에 있는 것에 견주면 비교적 양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상륜부와 3층 지붕돌 일부만 손상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철조비로자나불

무장사터 삼층석탑(보물 제126호)

버려진 신라의 한 하늘이 나뒹굴어 [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5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장사터 삼층석탑 - 이 달 균 적막하다 새벽은 그렇게 더디게 온다 무장산 첩첩산중, 깨진 기와조각처럼 버려진 신라의 한 하늘이 나뒹굴고 있었다 오늘 난 문무대왕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통일의 염원으로 서라벌을 달리던 웅혼한 영웅의 기개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탑 하나로 오로지 한겨울 무장사터 간간히 흩날리는 진눈개비가 추워라 가만히 역사의 문을 닫고 전설을 걸어 나왔다 우리가 찾아간 무장사터는 동장군의 서슬이 시퍼런 겨울 새벽이었다. 일찍 출발한 탓으로 여명을 한참 기다렸다. 건물은 아무것도 없고, 탑만 외로이 심산유곡에 있어 더욱 추운 기운이 밀려왔다. 절 흔적은 거의 없는데 위쪽엔 미타상을 조성한 인연을 적은 비문 무장사아미타불 조상사적비의 비신을 받쳤던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여기저기 깨진 기왓장들이 흩어져있어 절터임을 말해 줄 뿐이다. 무장사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전해오는데,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숨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병장기가 필요 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라 한다.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석탑은 숲 사

정혜사터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

허리 곧추세우고 이승의 강을 건너는 [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4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 이 달 균 친구여 생의 인연 하나 만나지 못했다면 지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했다면 서라벌 별밭에 숨은 미인도(美人圖) 보러가자 도덕산 해 기운다고 발길 재촉 마라 왕조 저문다고 눈물 보이지 마라 보아라 허리 곧추세우고 이승의 강을 건너는 경주 옥산서원 지나 도덕산과 자옥산 자락, 국보는 40호 십삼층석탑은 거기 서 있었다. 어떤 담장도, 제어할 누구도 없는 산 녘, 미인은 원래 외로운 팔자인가 보다. 단풍 드는 가을 정경이 이리 아름다운데 전혀 밀리지 않는 탑의 미려함이라니. 맑은 날 찾아간 십삼층 탑은 신라의 하늘을 이고 있었다. 이끼 낀 세월 속에서도 젊은 날의 자태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개 숙일 일도, 타협할 이유도 없다. 그저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여정이 당당할 뿐이다. 정혜사터 일대의 경작지에는 부서진 기왓장만 어지럽다. 가져오고 싶은 것이 있을까 찾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멀리서 볼 땐 그리 크지 않아 보였지만 가까이 가 보면 한참을 올려다봐야 한다. 당시로선 매우 큰 건축물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리라 짐작된다. 13층이란 층수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기단부와 초층탑신의 양식, 탑신과 옥개석이

밀양 소태리 오층석탑(보물 제312호)

매화도 지고, 탑도 지고 [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4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밀양 소태리 오층석탑 - 이 달 균 매화 지고 있었다 탑도 지고 있었다 지지 않는 절보다 지고 있는 석탑이 봄과 더 어울린다고 벗님은 말했다 밀양시 청도면 천죽사 경내에 있는 소태리 오층석탑(보물 제312호)은 꽃과 대나무가 함께 어울려 서 있다. 대부분 탑은 절 한가운데 있거나 폐사지 공터에 홀로 선 경우가 많은데 이 탑은 꽃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정겹다. 봄이면 매화가 피고 여름이면 백일홍이 핀다. 그 꽃들 속에서 유난히 흰 빛을 드러내는 화강암으로 만든 5층탑이 선명하다. 내가 찾은 날은 매화 분분히 지는 황혼 무렵이었다. 산비둘기 울음 속에서 꽃 지고 탑 지는 풍경이 아름답다. 1919년 탑 상륜부에서 고려예종 4년(1109)이란 당탑조성기가 발견되어 탑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수리 정비 이전에는 괴임석이 땅에 묻혀 있었는데 2002년에 정비하여 한결 안정감을 주고 있다. 단층 기단 위에 5층으로 탑신을 올린 형태인데 기단구성이 독특하고 옥개석도 특색이 있다. 탑 앞에서 벗과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상당한 시간을 보냈는데 마침 염불소리도 끊어지고, 아무도 만나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시인 이달균)

함양 벽송사 삼층석탑(보물 제474호)

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4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함양 벽송사 삼층석탑 - 이 달 균 기실 나무는 탑이 되고 싶었고 탑은 한 그루 나무이고 싶었다 널 보며 또 다른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키 세워 더 멀리 보면 무엇이 보일까 차라리 눈을 감아라 심안(心眼)마저 꺼버려라 벽송사(경남 함양군 마천면 광점길 27-177)는 혼자 가도 좋고 일행과 함께여도 좋다. 요즘은 제법 알려진 탓으로 관광객들의 발길도 끊기지 않아 고즈넉함은 덜 하다. 하지만 함양이야 어느 곳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곳이 아닌가. 개평마을이 그렇고 상림숲이 또한 그렇다. 오도재 지리산 제일관문을 지나면 마천면이다. 그렇게 벽송사에 닿는다. 벽송사는 조선 중종 때(1520년) 벽송 지엄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사찰이라 한다. 경내를 걷다가 “정진 중, 출입금지”라고 기와에 쓴 분필글씨를 보았다. 이 글을 보니 진정 “절 답다!”는 생각이 든다. 절은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정진하고 수행하는 도량임을 새삼 깨닫는다. 삼층석탑에 키를 맞추는 소나무는 굽어져 굄목이 고개를 받히고 있다. 나무의 끝가지는 탑을 향하고 있는데 탑은 짐짓 못 본 척 시침을

진주 묘엄사터 삼층석탑(보물 제379호)

석탑, 덕천강 윤슬에 몸을 담글까 [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4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진주 묘엄사터 삼층석탑 이 달 균 사람들아 제발 날 찾아오지 마시게 허허 내게 날개가 없는 줄 아시는가? 방금도 남해에 갔다가 덕천강에도 갔던걸 묘엄사터(경남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447-1)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시원하다. 이곳은 서부경남을 대표하는 큰 인공호수인 진양호와 가깝다. 근처 마을들은 수몰되어 사라진 고향의 아픔을 함께한 기억도 있다. 진양호는 덕천강물을 가두었는데, 이로 인해 남강 주변의 물난리를 다스렸다. 가까운 곳에 대평마을이 있는데 풍부한 물이 있어 큰 들이 형성된 까닭이기도 하다. 부처님 세상은 이렇듯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이런 곳에 석탑이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열 채쯤 되어 보이는 집들 사이로 삼층탑(보물 제379호)이 보인다. 이 탑은 고려 시대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는 4.6m이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석탑 1층에는 빛바랜 염주가 햇살에 익어간다. 주위에는 주춧돌과 석주, 부도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팔각형의 석재가 흩어져 있어 사각사각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대부분 석탑이 그렇듯 이 탑의 상륜부도 없어진 상태다. 하지만 뿌리 박혀 있다고 날개가 없을까. 우리들 몰래 남해바다에

양양 낙산사 7층 석탑(보물 제499호)

죽음이 영생(永生)의 문(門)임을 깨우쳐 주었다 [천년의 얼 석탑, 사진ㆍ시조로 다가가기 4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양 낙산사 7층 석탑 시인 이 달 균 미친 듯 불기둥이 천지를 덮쳐왔다 훌훌 잿더미를 홀로 걸어 나오며 죽음이 영생(永生)의 문(門)임을 깨우쳐 주었다 설악의 끝자락이 동해에 이를 때 만나는 절이 바로 낙산사다. 수평선이 시작되는 이곳 단애에 관음보살이 계셨던가. 그 물음을 안고 의상대사는 여기까지 찾아왔으리라. 법력 깊은 기도가 통했던지 용에게 여의주와 염주를 받게 되고, “대나무가 솟아나는 꼭대기에 불전을 지어라.”라는 말씀에 따라 낙산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유서 깊은 절도 화마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2005년 4월 5일, 하필이면 식목일에 일어난 불은 홍련암 하나만을 남기고 죄다 태워버렸다. 누구도 제어 못 할 불기둥 속에서 탑은 저 홀로 걸어 나와 바다를 향해 섰다. 영생의 문은 이곳에서 비롯되는가. 이 죽음의 순간이 아니었으면 생명의 소중함을 어찌 알았으랴. 그래서인지 유난히 탑 앞에서 손을 모으는 이의 기원은 간절해 보인다. 이 7층 석탑도 조선 세조 때 낙산사 중창 당시 함께 세워진 것이다. 제아무리 석탑이라고 하나 그 화마를 온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고, 표면이 균열되는 등 상당한 훼손을 입었다. 이 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