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장사지냈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망곡(望哭)을 하였고, 백관(百官)들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곡하였다.” 이는 《영조실록》 21권, 영조 5년(1729년) 1월 26일 기록입니다. 《영조실록》은 뒤이어 “아! 통탄스럽다. 무신년(1728년)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으니 곧 사기일(私忌日)이며, 나이 겨우 10살로써 왕세자에 있는지 겨우 4년이었다. (가운데 줄임) 아! 나의 비덕으로 믿는 바는 오로지 왕세자였고,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았기에 동방(東方)의 만년의 복이 될 것을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10살 만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했겠는가?”라고 영조는 통탄해했습니다. 사실 효장세자는 ‘효성이 지극했고,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모습이 의젓하고 행동이 침착했다.’라고 합니다. “어느 날 서운관에서 탁상시계인 문신종(問辰鐘)을 바치자 그냥 서당에 놓아두었다. 한데 젊은 내관이 그것을 구경하다 잘못 건드려 고장이 나버렸다. 영조가 서당에 찾아왔을 때 중관이 그 일을 고하면서 내관을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우연히 일어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김동석이 오래전부터 미국의 교사들을 위한 한국문화 강좌(Korean History and Culture Seminar for American Educator) 시리즈를 계속해 왔다는 이야기와 함께 LA 교육국에서 한국음악을 교육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LA지역에서 처음으로 국악방송을 시작한 이야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김동석이 UCLA으로 유학을 떠난 해는 1971년도이니 올해로 꼭 50주년이 된다. 그때를 회고하는 그의 말이다. “당시 이곳의 한인 인구는 1만 명도 안 되었지요. 지금처럼 번듯한 한국식품점도 없어서 거의 모두가 미국인이나 일본인 마켓을 이용하고 있었고, 한인교회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이었으며 당시 한국어 방송을 들을 기회는 없었어요. 다만 <한국일보> 미주 지사가 유일하게 교포들에게 고국의 소식과 한인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미디어였으니까요. 그 뒤, 이민 조건이 완화되어 한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가 오게 되면서 코리아타운이 기존의 크렌셔 지역에서 지금의 올림픽가로 조금씩 이동하게 되었지요. 올림픽 거리에 한국식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조선경국전」- ‘의금상경(衣錦尙絅)’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겹의 얇은 옷을 덧입어 화려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중용」- 검이불루 화이불치.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을 평하며 사용한 이 표현은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궁궐 건축의 도(道)를 이야기할 때 다시 한번 소환됐다. 조선의 미감을 단박에 정리해낸 이 여덟 글자가 뜻하는 바는, 바로 균형감각이었다. 검소하되 곤궁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되 과시하지 않는 이런 균형감각은 조선왕조 전체를 관통한 미의식이었다. 중용에 나오는 ‘의금상경(衣錦尙絅)’ 또한 ‘검이불루 화이불치’와 그 맥을 같이한다. 군자는 비단옷의 광택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을 염려해 비단 위에 얇은 삼베를 덧입어 색감이 은은히 드러나도록 했다. 대개 조선의 미감이란, 이렇듯 절제와 조화와 균형이었다. 과하게 꾸미지 않아도 무심히 배어 나오는 아름다움, 그것이 조선의 미감이었다. 여기, 조선왕실의 이런 균형감각에 주목한 멋진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산하 전통문화상품개발실은 학생들이 조선왕실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