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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 이제 나를 필요로 하는 우리문화 열심히

[한갈이 만난 배달겨레] 1 '우리문화신문' 연변지사장 석화 시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갈(김영조)은 배달겨레 문화인들을 만납니다. 올곧게 얼넋을 다하여 우리 겨레문화와 함께 살아가는 문화인들의 마음을 열어볼까 합니다. 그 첫 번 순서로 중국 연변 동포 석화 시인을 만납니다. 석화 시인은 연변에서 대학 때부터 문학활동을 해온 문학인으로 널리 알려졌고, 방송인과 출판인으로서도 큰 일을 해왔습니다. 석화 시인의 시에는 민족이 고스란히 담겼으며, 따뜻한 마음이 함께 하고 있음은 물론 늘 새로운 방향을 찾아나가려는 시도를 합니다.
 

 

 

- 연변은 우리 동포들이 민족주체성을 지키고 살아온 어쩌면 나라밖 유일한 곳이다. 남의 땅에 발을 붙이며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연변 우리 동포들이 이렇게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그 이름은 내가 원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고 원치 않다고 버려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름은 “중국조선족”이다. 이는 우리가 원해서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그저 조선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경계를 넘어서게 되자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월강(강을 건넘)”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조선족”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름자체가 이중적인 것처럼 우리는 늘 두 요소 사이에서 흔들리기도 한다.

 

때론 중국 안 동일한 국적자로 또는 한반도의 남과 북, 두 나라사람들과 핏줄이 같은 것으로 모두 마찬가지일거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언제나 주류민족 또는 주류사회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양쪽에서 모두 “비주류”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 중국조선족이 100년 이상 중국에서 자기의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연변이란 이 가장 큰 조선족집거구가 있었고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문화를 지키고 보존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우리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석화라는 이름은 연변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까지 널이 알려졌다. 그 까닭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신을 알고 본연에 충실 하려고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 또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충주 석씨 32세손, 입북 14대, 이주 3세대로 중국 용정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 또는 아이덴티티(identity)일 것이다. 중국공민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또한 우리말과 글로 노래하는 시인으로서의 노력을 다 하는 것이 내 삶의 의미와 내용이었다.

 

나의 작품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중국과 한국의 교과서에 오르고 중ㆍ한ㆍ일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는 것, 모두 고마운 일이다. 일전에는 한국 경주에서 펼쳐진 “세계한글작가대회”초청으로 “중국조선족시문학의 한 경향”이라는 제목의 주제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모두는 내가 중국조선족시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석화 시인의 시 <천지꽃>에는 “내 이 허물 / 다 벗어놓고 / 너처럼 피어나랴 / 이 천지간에“라는 구절이 있다. 석화 시인의 가슴 속을 드러내 보인 것인가?

 

“이 시는 연길에서 발행된 문학월간지 《천지》 1995년 8월호에 발표한 연작시 “도문을 가며” 가운데의 한 수다. 연변지역에서는 진달래꽃을 “천지꽃”이라고 부른다. “턴넬”, “피안” 등 제목의 작품과 함께 엮은 이 시에서 궁극적으로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려는 마음을 담아보려 하였다.

 

- “강 - 님아, 가람 건너지 마소. 〈공후인〉”이란 시도 있다. 혹시 석화 시인이 어떤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강은 흐름의 연속성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경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고전의 하나인 “공후인”은 강을 건너는 백수광부의 형상을 빌어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그 초월은 항상 희생을 감내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현실에의 안주는 정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생명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초월하는 것의 연속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초월은 희생을 동반하며 그것을 극복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강을 건너려는 자와 “돌아오라”고 부르는 자, 그 갈등에서 우리의 삶은 의미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1988년 5월 19일자 《연변일보》에 실린 시다.“

 

- 연변에서 문학활동은 물론 방송ㆍ출판계에 오래 몸담아 오면서 보람을 느낀 것이 있다면?

 

“나는 1976년 5월 9일자 《연변일보》 문예란에 첫 작품을 내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십 년간 문학창작에 종사하였다. 내게 생명을 준 그분들과 함께 내 숨결을 운율에 엮어내게 하여 나의 꿈을 현실로 이뤄준 이 땅, 그리고 내 삶의 편린들인 나의 작품을 읽어주고 사랑해 준 독자들이 지금의 나를 완성시켜 주었음에 큰 고마움을 느끼고 보람을 찾는다.“

 

- 출판계에 몸을 담고 있다가 정년퇴직한 것으로 안다. 이제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저는 지난 2018년 7월 4일자로 열여덟 살 나이에 시작한 공직생활을 마침내 접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방송국, “연변문학” 월간사를 거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정년퇴직하며 43년에 이르는 공직생활을 드디어 마무리하였다. 나의 삶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겠다. 이제부터 나의 옹근 시간은 나를 쓰임에 부르는 일에 모두 바치게 되었다.“

 

- 한국의 “우리문화신문” 지사장을 맡은 것으로 안다. 어떤 까닭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나?

 

“우리문화신문”과의 인연은 나에게 새롭고 아름다운 출발이다. 한 해 전 “신한국문화신문”의 제호로 “중국조선족문학창 – 석화대표시 감상과 해설”과 “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를 연재하며 소중한 지면을 내어주신 김영조 사장님, 연길에 방문오시여 연변대학에서 특강을 펼치고 우리 작자들과 만나며 중국조선족의 문학과 삶에 따뜻한 관심을 보내셨다. 이번에 “우리문화신문”으로 제호를 바꾸며 한국뿐만이 아닌 이 세상 옹근 겨레의 우리문화신문이 되었다. 이렇게 명실 공히 우리 모두의 문화신문으로 거듭나며 중국 연변지사를 설립하고 지사장이란 책임도 맡겼다. 이제부터는 한 가족으로 “열심히”라는 과제만 남았다. 귀하고 아름다운 우리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열심히 또 열심히 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