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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끌로드 씨아리 <첫 발자국>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20]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1)

 

뭐가 자나갔을까? 눈 위에 뚜렷이 남은 이 자국은.

나무토막을 끌고 간 자리도 아니고 커다란 짐승이 지나간 자리는 더욱 아니니, 넓이로 보나 자국으로 보나 눈썰매 자리임이 틀림없다. 대설, 대한이 다 지나도록 눈 한 송이 구경할 수 없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조바심이 났으랴. 분명 어린 자식의 보챔을 당해내지 못한 아비가 첫 눈이 내리자마자 동 트기를 기다려 이 솔밭에서 눈썰매를 끌었을 것이다. 첫 발자국을 찍지 못한 아쉬움도 잊은 채 썰매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 본다. 그 자리엔 아비의 사랑이 남아있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남아있고 옛 기억의 아련함이 남아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지나갔다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자국을 남긴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바람과 저 부드러운 새털구름조차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기며 자나간다.

 

(2)

 

아직은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찔렀다.

고향땅 해주에는 벌써 남풍이 불어와 봄 내음이 가득하겠지만 북국 만주의 사월은 봄이라도 봄이 아니었다. 중절모를 고쳐 쓰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사보국(一死報國, 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함)의 뜻을 품고 열여덟 나이에 동학에 입도하여 탐관오리들과 싸우던 일, 국모시해범을 응징한 죄로 사형언도를 받던 일, 고종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기적처럼 목숨은 건졌으나 끝내 경술국치를 막지 못한 자괴감, 모든 백성이 똘똘 뭉쳐 삼천리강산에 만세 소리를 드높였으나 돌아온 것은 독립이 아니라 일제의 악랄한 박해 뿐 이었다.

 

상해 행 증기선 위에서 백범은 다시 한 번 뭍에 찍힌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눈밭을 걷거들랑 어지러이 걷지마라

지금의 내 발자국은 뒤 따르는 자의 길잡이 되리니

穿雪野中去 / 不須胡亂行 / 今朝我行跡 / 遂作後人程

 

<나는 과연 제대로 걸어 왔던가? 지금부터 나는 새로운 길에 발자국을 찍는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나라를 되찾는 그날 까지!>

 

(3)

 

세상은 홍진(紅塵)*이다. 우리 인류가 그렇게 만들었다.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 시작도 끝도 없이 넓은 우주에서도 지구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별이다. 하지만 지구는 아름다워도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호모사피엔스라 불리는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탐욕스런 존재다. 인간의 진취성이 눈부신 과학문명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본질은 탐욕과 이어진다.

 

아주 짧은 얼마 전 지구에 나타난 인간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다. 다른 생명체가 누려야할 권리를 송두리째 앗아 가면서까지. 이 아름다운 별을 황폐화 시킨 인류는 이제 곧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주 식민지를 개척하여 떠날 수도 있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유전자를 싣고 다른 별에 가서 복제해 내어 인류의 절멸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택받은 극소수의 행운일 뿐이다.

 

욕망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행성 하나쯤은 거뜬히 파괴할 만큼. 그래도 사람들은 욕망을 멈출 줄 모른다. 서로 더 갖겠다고 아우성이다. 배가 불러도 부른 줄 모르고 에리시크톤*처럼 집어 삼킨다. 삶이 허망해진다. 내가 과연 살아낼 수 있을까? 물질이 지배하는 이 탐욕의 바다에서. 차라리 나도 세상과 어우러져 만수산 드렁 칡처럼 얽혀 그렇게 한 세상 놀아 볼거나? 인생 뭐 있냐 하면서.

 

아서라, 말아라. 나는 그럴 깜냥도 못된다.

그저 하던 대로 하고 살자. 남이 알아주고 말고는 뒷일이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바르게 걷다보면 언젠가 뒤 따르는 이 있겠지.

 

<눈밭을 걷거들랑 어지러이 걷지마라

지금의 내 발자국은 뒤 따르는 자의 길잡이 되리니>

 

이양연*을 스승으로 새긴다.

 

 

영화배우이면서 기타연주자인 끌로드 씨아리는 1944년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전문 연주자로 나설 만큼 천재성을 지녔다. 십대 중반과 후반은 록 밴드에서 활동하다가 열아홉 살에 클래식 기타로 돌아왔다. 1966년에 발표된 “안개 낀 밤의 데이트”는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었고, 1974년에 발매된 <첫 발자국> 역시 웬만한 음악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만한 곡이다.

 

동갑나기 벗이자 작곡가이며 뮤지컬 제작자인 끌로드 미셸 숀베르그가 작곡하였다. 소림사 권법을 수련할 만큼 동양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 끌로드 씨아리는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7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일본에 눌러앉아 버렸다.

 

주)

* 일사보국(一死報國) : 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함

* 홍진(紅塵) : 희뿌연 먼지처럼 혼탁한 속세

* 에리시크톤(Erysichthon)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거역한 죄로 걸신이 들어, 눈에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다 끝내는 자신의 팔과 다리, 몸통과 얼굴 심지어 혀와 입술마저 먹어치우고 이빨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 이양연(李亮淵) 조선 후기 영조, 철종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자.

그의 시 ‘야설(夜雪)’은 한 때 서산대사, 혹은 김구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