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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그리고 우리말

광화문 현판, 세종정신 담아 한글로 해야

처음 이름 정문(正門), 세종 때 광화문으로 바꿔

[우리문화신문=홍사내 칼럼니스트] 

 

하나. 들어가는 말, 광화문의 유래

 

광화문에 대한 처음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실록에서는, 경복궁을 준공하면서 태조가 정도전에게 명하여 모든 궁과 성에 이름을 지어 붙이도록 하였는데 유독 광화문의 이름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처음 보이는 글은 태조 4년(1395) 9월 29일 기록인데 여기에서는 경복궁을 다 짓고 그 남문을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지었다고 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그해 10월 7일 기록에서는 정도전이 ‘정문(正門)’이라 이름지어 임금께 글을 올리면서 그 이름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두 글만 본다면 정도전이 먼저 ‘정문’이라 이름지었는데, 뒤에 《태조실록》을 엮은 실록청 사람들이 실록을 엮을 당시에 바뀌어 쓰던 이름인 ‘광화문’으로 잘못 기록하였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정문을 광화문으로 바꾼 연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살펴보니 《태조실록》은 두 번에 걸쳐 엮었다. 처음 태종 13년(1413) 3월에 엮었던 것을 세종 30년(1448) 6월에 정인지 등이 증보 편수하였음이 《태조실록》 부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세종실록》에는 세종 6년(1424)부터 광화문이란 명칭이 자주 쓰이고는 있으나 세종 8년(1426) 10월 26일에야 그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광화문의 이름에 대해서는 설명한 기록이 없으니 ‘광화문’의 이름 뜻을 정확히 기록한 글은 찾을 길이 없다. 한편 세종 13년(1431) 4월 18일 실록에는 ‘光化門成’이란 기록이 있음을 보아 세종 때 궁궐 안팎을 새롭게 증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세종 8년(1426)에 광화문이란 이름으로 개명하였고, 태조, 정종, 태종의 실록을 모두 세종 때 엮으면서 옛 이름인 ‘정문’ 대신 새이름 ‘광화문’으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 광화문의 기록

 

실록의 기록을 번역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ㄱ) 태조 4년(1395) 9월 29일

 

이달에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줄임…)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 세 칸이 상ㆍ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ㆍ삼군부ㆍ육조ㆍ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

ㄴ) 태조 4년(1395) 10월 7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을 강녕전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을 연생전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침전)을 경성전이라 하고, 연침의 남쪽을 사정전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이라 하고, 동루를 융문루라 하고, 서루를 융무루라 하고, 전문을 근정문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그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

 

* 연침 (燕寢) : 임금이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하던 집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줄임…)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헐뜯어 고해바침)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허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일의 실마리를 자세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ㄷ) 세종 8년(1426) 10월 26일

집현전 수찬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 셋째 문을 광화(光化)라 하고, 근정전 동랑 협문을 일화(日華), 서쪽 문을 월화(月華)라 하고, 궁성 동쪽을 건춘(建春), 서쪽을 영추(迎秋)라 하고, 근정문 앞 돌다리를 영제(永濟)라 하였다.

 

셋. 맺는 말, 새 현판 이름은 세종정신을 담아야

 

 

굳이 ‘광화문(光化門)’을 한자로 해석한다면 중국 요순 임금의 다스림을 ‘광화(光華)’라고 높이듯이 임금의 덕치를 만백성에게 광대하게 펼치는 문이란 뜻으로 풀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 궁궐 등에 이름지은 뜻풀이를 살펴보면, 당시 새롭게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정립하면서 유교 통치 제도와 의례를 따르고 중국의 규례를 본받으려 했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은 한 치의 흠이 없도록 중국의 문화를 정밀하고 올바르게 배우고 따르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모른다. 임금은 경연에 나아가 항상 배우고 따르기를 신하와 의론하였다. 모화(慕華)란 중국을 숭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중국의 높은 문물과 문화를 성실히 따라서 보다 도의적이고 훌륭한 정치를 하자는 데 뜻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세종은 우리말이 중국과는 너무도 달라서 백성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소통하지 못함을 보고 새로운 글자를 만듦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문화 변혁을 시도하였고, 개국초부터 태조가 붙였던 이름 ‘정문’을 과감히 ‘광화문’이라고 바꾼 개혁의 임금이었다.

 

이제 조선의 궁궐을 우리 문화재로 잘 보전하려는 뜻도 좋지만 보전과 함께 중요한 것이 현대인의 자긍심과 새롭게 느끼는 역사관이다. 그러므로 현판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세종의 정신으로 돌아가 세종의 눈으로 바라볼 때, 아직도 알 수 없는 뜻의 한자 이름을 걸어 놓느니 보다는, 세종처럼 한글로 이름을 적거나 새로운 우리 식 이름을 지어 시대의 정신을 담아낸다면 이것이야말로 살아 숨쉬는 역사, 자랑스러운 겨레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