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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우리 가요사의 또 다른 얼굴 “미8군 무대”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26]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국어사전에서는 “음악”을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형식에 의해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해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 풀이하고, “노래”는 ‘가사에 곡조를 붙여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게 만든 음악’이라 밝히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근대 이전에서의 제대로 된 “음악”은 일반 백성이 가까이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악기의 연주가 없는, 극히 기초적 수준의 틀만 갖춘 농요나 구전민요들이 널리 불렸고, 그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노래들이 한말개화기까지는 이 땅의 “대중가요”였다.

 

“가요“라는 용어는 고려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대중음악에 국한된 용어는 아닌듯하고 이후 한말에 와서 ‘창가’, 일제 초기에는 “유행창가” 그 이후엔 “유행가”로 그 변천과정을 거쳐 1960년대 이후에 “대중가요” 또는 “가요”라는 용어가 정착하게 된다.

 

대중가요의 기원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그 기준이 심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른 바 “현대적 작법에 따른 창작 곡”이라는 관점을 적용한다면 <낙화유수>*가 나온 1927년을 대중가요역사의 시작으로 치는 것이 보편적 견해이다.

 

우리 가요는 짧은 여명기를 거쳐 곧바로 융성기에 접어든다. 유성기(일본식; 축음기)의 확산에 힘입어 레코드 산업은 30년대에 이미 황금기를 맞는다. 이에 따라 우리 가요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나 그 영화의 기간은 짧았다.

 

1941년에 터진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의 식민지인 이 땅도 전시체제하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가요산업 역시 통제와 검열의 강화로 인해 군국가요만 생산될 수밖에 없는 암흑기로 접어든다.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겨레는 광복을 맞았으나 가요계는 광복은커녕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력이 한꺼번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1948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 걸음 내디뎠으나 뒤이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또 다시 주저앉게 된다.

 

이 시절 우리 대중음악인들은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보릿고개”를 겪게 된다. 그 때 조금이나마 숨 쉴 숨구멍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미8군 무대”였다. 1945년 8.15해방과 동시에 미 군사 고문단이 이 땅에 들어오고 뒤 이어 미군의 진주가 이루어진다.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면 그곳이 설령 전쟁터라 할지라도 문화가 있고 반드시 음악이 흐르기 마련이다. 당시 미군들은 주로 “구락부”라 불리는 클럽을 애용하였는데,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한 연예산업이 시작된다. 이 때 몇몇 악단과 가수들이 출연하였는데, 이곳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음악인들이 “일반무대‘로 나아가 한국가요계를 쥐락펴락하게 된다.

 

이 “시장”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이어졌으나 전쟁을 거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한국전쟁이 남긴 “부산물” 가운데 하나가 미군의 대규모 주둔이었다. 이는 곧 미군 상대의 연예시장도 커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들어온 미 24사단은 규모가 점점 커져 55년에 이르러서는 아예 미8군 사령부가 오끼나와에서 용산으로 통째로 이전해 오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때부터 이 땅에 주둔하는 미군을 통틀어 ‘미8군’이라 하였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을 ‘8군 무대’라 부르게 된다.

 

‘8군 무대’ 초기에는 미 본토에서 USO공연단이 직접 한국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조니 마티스라든가 냇 킹 콜, 앤 마가렛,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같은 초 거물급 스타들도 포함 되어 한국을 다녀갔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우리 연예계에 그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우리 연예인들은 초기에는 미군 측의 요청이 있을 때만 출연하였는데, 전국 미군클럽의 수가 264개에 이를 만큼 수요가 늘자 아예 ‘8군 무대‘ 연예인을 체계적으로 관리, 공급하는 전문용역업체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그 연예인 공급업체의 효시인 “화양흥업”의 설립자는 트럼펫 연주자이며 “쇼”단장인 베니 김(김영순)이란 인물로, 그 후 그는 ‘8군 무대의 대부’로 군림했고 화양흥업 역시 그 방면의 업체 가운데 최고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화양”의 뒤를 이어 “유니버설”이 등장하여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이에 질세라 “화양”측에선 “삼양”, “신일”, “극동”같은 자회사를 만들어 반격했고 “삼진” “공영” “대영”같은 후발업체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8군 무대가 커짐에 따라 당연히 심사도 엄격해 졌는데,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심사위원들의 예리한 귀를 만족 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 그야말로 “피나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당시 쇼 단체들은 “플로어 쇼”와 “하우스밴드” “오픈밴드”로 구분 되었는데, 플로어 쇼는 음악만이 아니라 코미디와 무용, 마술까지 망라한 종합 연예단체였다. 이들은 전국의 200개가 넘는 미군 기지를 순회하고 다녔다.

 

하우스 밴드는 소규모 악단으로 미군부대의 부속클럽에 전속돼 활동하였고, 오픈밴드는 아직 심사에 통과하지 못한 밴드로 미군부대 주변의 기지촌 클럽에 출연하는 소규모악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석 달 또는 여섯 달 마다 심사를 받았는데, 직전 심사에서 우수한 등급을 받은 악단도 탈락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까닭에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독창성도 함께 갖추게 되어, 뒷날 일반무대에서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출연료도 궁금해지는데, 초기에는 현금 대신 양담배나 양주, 초콜릿 같은 물건으로 지급했다. 이를 암시장에 내다 팔아 현금화 했는데 생각보다 짭짤했다한다.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딸라”로 지급했는데, 한 해 총 지불액이 120만 달러에 이르렀다한다. 이는 우리나라 일 년 치 수출총액과 맞먹는 액수였다.

 

이렇게 좋은 시절을 보내던 8군무대도 “월남전”이란 국제정세의 변화로 뜻하지 않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60년에 발발한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선이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참전미군의 숫자도 늘어만 갔다. 이에 미국정부는 60년대 중반부터 주한미군을 빼돌려 투입했고 주한미군의 수가 급감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당연한 귀결로 8군무대도 축소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대형 쇼단인 “플로어 쇼”가 된서리를 맞게 된다. 이는 주한미군의 감소에 따른 영향도 있었으나 “비틀즈”라는 영국밴드의 성공으로 대형악단 위주에서 소규모 악단이 인기를 얻는 국제적 흐름과도 맞물린 결과였다.

 

그 뒤 8군 무대는 소규모 악단 위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70년대 들면서 물줄기가 완전히 말라버리고 말았다. 미군부대 안의 부속클럽에선 아예 전속제를 없애 버렸고, 주변의 기지촌 클럽들도 연예비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자 밴드를 고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때 클럽에선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디제이를 채용 했는데 그 때 필자도 기지촌 클럽에서 디제이로 근무하면서 “본바닥 음악”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 가요의 다양성을 열었고 영ㆍ미 음악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었던 미 8군 무대. 동전이 양면으로 되어있듯 8군 무대도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건 아니다. 우리 국민의 정서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동떨어진 세계”였다는 점은 흠결로 남는다. 그러나 8군 무대의 공과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이 역시 우리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는 점만 밝혀 두고자 한다.

 

 

* 주;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가요인 <낙화유수>는 1927년에 김서정 작사 김영환 작곡으로 발표 되었다. 김서정은 인기변사 김영환의 예명으로 사실 같은 인물이다. 이구영이 감독한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로 이 감독의 동생 이정숙이 극장에서 직접 불러 큰 사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2년 뒤인 29년에 음반이 출시되기에 이른다.

 

당시 이정숙은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생으로 동요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였다. 그로 인해 <낙화유수>를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로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연구자도 제법 있다. <낙화유수>는 신 카나리아가 부른 <강남 달>의 원곡으로 남인수의 <낙화유수>와는 동명이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