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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천년 고목 은행나무의 양평 용문산 용문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용문사 창건은 913년 신라 신덕왕 2년으로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신라말 경순왕이 행차하여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모두 900년 대 초로, 용문사가 창건된지 1,000년이 넘었다는 것은 일치한다.

 

용문사의 창건이 1,000년이 넘는다는 것도 고찰로서의 면모를 자랑할 만 한 일이지만, 양평 용문사는 그보다는 절 안에 1,200년을 넘어보이는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42.5m, 사람의 가슴높이에서의 나무의 둘레가 14m에 이르며, 나무가지의 지름이 동서 28m, 남북이 28m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누가 심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무의 추정나이로 볼 때 1,200년이 넘어 보임으로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심었다는 설과,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슬픈마음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자신의 지팡이를 꽂고 간 것이 자랐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은행나무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조선 세종때 신비한 나무로 당상관 벼슬을 받았다. 이 나무는 그 신령스러움으로도 전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에는 누군가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은 하늘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자 모두 놀라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한다. 한편, 1900년 초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탄할 당시, 용문사가 의병들의 전진기지가 되었을 때 일본군들이 의병소탕을 위하여 용문사를 전부 불태웠을 때에도 은행나무는 그 패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1919년 고종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가 부러졌고, 1945년 8.15 광복, 1950년 6.25 한국전쟁, 1961년 4.19, 1962년 5.16 등 국가적 변고가 생겼을 때에도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이런 신비한 장수목인 은행나무는 이제 용문사의 보물로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되어 살아있는 보물로 보호받고 있다.  오래된 물건은 신물(神物)이 되듯이, 나무도 오래되면 신령스러움이 생기는 것인 듯 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때라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들이 나무 아래 소복하게 떨어져 쌓였는데 용문사에서는 은행의 수확을 쉽게 하기 위하여 나무 주변에 망으로 된 멍석을 넓게 깔아 떨어진 은행을 거두어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년이 넘도록 많은 열매를 맺어주어 중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내려준 은행나무이지만 가을이면 주변에 은행 썪는 냄새가 나서 이 가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절의 면모는 많은 전란속에 여러차례 변하며, 한 때는 큰 절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지만, 전쟁의 참화를 피하지 못하여 완전히 없어지는 재난을 겪기도 하였던 용문사는  요즈음 하나 하나 전각들이 들어서고 경내가 정비되어 서울 경기지방의 아름다운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천년 은행나무 외에 고찰 용문사의 보물로는 고려말 큰 스님으로 추앙받았던 정지국사의 승탑이 있으며, 관음전에 모셔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세음보살이 있다. 많은 국난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보물들이 오래토록 전해지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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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