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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박물관에서 만난 고려 홍법국사 실상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수많은 승탑 중 가장 화려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승탑으로는 원주에 있었던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과 충주에 있었던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이다. 승탑은 왕사 국사급 스님들이 돌아가신 뒤 나온 유골을 수습하고, 그 때 나온 사리들을 모아 스님들이 살았던 인연깊은 절에 탑으로 모신 것인데, 승탑의 유래는 불교의 여러 종파중에서도 선종(禪宗: 경전이나 염불 등이 아닌 좌선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불교종파)이 성립된 후의 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시대에는 선종의 스님들 중 훌륭한 스님들은 국가나 왕의 스승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삼아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하며 국가적 행사에 왕사 국사를 앞세워 국론을 통일하고 결집시켰다. 이분들은 정치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깊은 산속에 수행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국가적으로는 든든한 의지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분들이기에 왕사 국사가 돌아가시면 국가에서는 큰 다비장을 마련하여 화장하였고, 이때 나온 스님의 사리를 모아 승탑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그런 승탑이지만 스님들의 덕과 법력의 정도에 따라 승탑의 규모와 형식도 달랐는데, 그 당시 국가적인 역량을 다하여 세운 승탑들은 오늘에 남아 한국인의 미적 감각을 알려주는 귀한 유물이 되어 국보와 보물들이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승탑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승탑 중 하나가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앞쪽 벽에  다른 여러 승탑들과 함께 서있다.

 

이는 정토사지 홍법국사실상탑인데, 이 승탑이 이곳으로 온 연유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국의 문화재를 조사하던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은 전국을 뒤져 선조들의 유적을 찾아나섰고, 특히 조선시대에 폐사된 큰절들을 뒤져 관리가 안되고 방치된 석탑과 석등 그리고 스님들의 승탑과 석탑들을 일본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총동원하여 전국의 문화재들을 경복궁으로 모았는데, 이 홍법국사실상탑 또한 그 때 서울로 옮겨져, 일본으로 반출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반출되기 전에 광복을 맞이하여 오랫동안 경복궁 옆에 서있다가, 일제가 세운 거대한 중앙청을 허물고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새로 지은 뒤, 다른 많은 석탑 석등 승탑 승탑비 등과 함께 이곳으로 다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가 불교를 그처럼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도 충주에 정토사도 온전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홍법국사승탑과 탑비도 정토사지에 그대로 남아있었을 것인데, 조선말 불교의 퇴락으로 전국의 사찰들이 폐사되어 가고, 고려시대에는  큰 절 중에 하나였던 정토사도 폐사되어 전각들은 다 없어지고, 돌로된 기단과 주춧돌 그리고 정토사의 고승이었던 홍법국사의 승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만이 방치되어 있자. 이를 좋은 장식품으로 생각한 일본인들이 욕심을 부려 주인없는 승탑으로 이리 저리 옮겨다니고 있는 것이다.

 

홍법국사는 고려 초기 목종 때 스님으로 고려에 선종을 크게 유행시켰다. 이에 고려 성종은 스님을 대선사로 승계를 내리고, 목종때에는 살아생전에 국사로 받들어 모셨다. 홍법국사의 행적은 고려시대의 기록이 대부분 분실되어 다른 기록이 별로 없고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나마 알 수 있는데, 비문 또한 마멸이 심하여 남아있는 글자들을 해석하고 나머지는 추정할 수밖에 없다.

 

비문에 따르면 그의 출생연도는 추정상 신라후기인 신덕왕때인 912 ~ 916년으로 보이며,  12세 출가하여  고려태조13년(930) 수계하였다. 그는 930년 마가갑사의 계단(戒壇 계를 받는 제단)에서 스님으로 계를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마가갑사는 개경에 있는 오관산에 있었다.

 

국사는 수계 후 얼마 되지 않은 때 송나라행 사신일행의 배를 얻어타고 중국으로 떠나 절강지방을 시작으로 복건성까지 중국의 선사들을 찾아 구도여행하였고, 5년 정도 중국의 각지역을 만행하며 고승들과 문답을 주고 받으며 수학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개경의 보제사와 봉은사 등 큰절에서 불법포교에 전념하였다. 이에 고려왕실에서는 그의 덕을 크게 높여 성종이 대선사로 추서하였다. 말년에는 충주지방으로 내려가 정토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수행하다 결가부좌를 한 자세로 좌탈입망(座脫立亡; 앉은 자세로 돌아가심)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비문에 따르면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여러 선지식(善知識; 수행을 많이하여 존경을 받는 스님들)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제행무상의 이치를 깨닫고, 법성(法性: 불교의 진리)이 공(空)한 이치를 깨치고, 색(色 ; 사물의 모습)신 또한 몽환(夢幻; 꿈이나 환상)과 같음을 보았다고 하며, 그는 말하기를 "도를 배움에 어찌 고정된 스승이 있겠는가?"라며 스승이 될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구도행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후학을 지도할 때에에도 누구나 법(法;진리)을 물으면 바짐없이 답하여 주어, 그의 가르침은 흡사 늘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어 주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이런 스님이 열반에 들자 당시 목종은 국서로 조의를 포함과 함께 물품을 보내고, 시호를 홍법(弘法)으로 정하고 탑명(塔銘)은 실상(實相)이라 하였다. 그의 비는 당대 명필이었던 손몽주로 하여금 비문을 짓고 1017년 현종8년 승탑과 탑비를 완성하였다.  홍법국사탑비의 높이는 3.75m 이며 보물 제359호로 지정되었고, 승탑은 높이 2.55m 이며 국보 제 102호로 지정되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홍법국사실상탑과 탑비를 보며, 깨져나간 부분들이 많아 아쉬움이 컸으며, 그보다도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행하였던 수많은 가르침과 행적들이 비문에 남은 것 뿐이라는 사실에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본래 자리했던 정토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박물관의 유물로 남아있음 또한 매우 외람되었다. 현재 충주 정토사지에는 박물관앞에 세워진 탑을 모방하여 깨어져 나간 부분들까지 복원한 모형탑이 서있다.

기자정보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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