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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고려고찰 양양군 미천골 선림원터를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강원도는 백두대간의 높고 험한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뻣어내리면서 동쪽에 동해바다를 두고있고, 서쪽으로는 첩첩산중 아주 험한 산지로 되어있다.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산들로 동서를 넘나들려면 어디에서든 1,000m의 고갯길을 넘어야만 하였다.

 

이처럼 백두대간의 동쪽과 서쪽은 험한 산세로 말미암아, 옛날에는 한번 넘기가 평생에 한 두 번도 하기 어려웠을 첩첩산중이었다. 그런데 그 험한 첩첩산중에도 부처님의 뒤를 이어 우주의 진리를 깨쳐보겠다는 스님들의 발자취가 있으니, 당시 스님들의 일념에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미천골은 강원도 양양의 깊은 산골로, 백두대간의 동쪽에 있으면서도 찾아들기 매우 어려운 산골짜기였다. 지금은 사통팔달 길도 잘나있고,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까지 나있어 쉽게 찾았지만, 선림원지가 크게 융성하던 신라말에는 참으로 찾기 힘들었을 험한 곳이었다.

 

이곳 선림원터에는 신라말 홍각선사라는 스님이 있어 수많은 스님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를 찾아온 스님들이 많아, 스님들이 먹을 밥을 짓기위하여 쌀씻은 물이 계곡아래까지 흘러내려와 물색깔이 하얗게 변하여 이곳을 미천골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곳은 첩천산중이라, 큰 절을 지을만한 넓은대지를 만들 수 없어, 비탈진 계곡을 다듬어서 최소한의 터를 만들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배치를 계획한 뒤, 대웅전 전각앞에 탑을 세우고 절의 면모를 잡은 뒤, 주변에 전각을 지어서 계곡의 이곳 저곳을 모두 선림원으로 가꾸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언제인지 큰 홍수에 그동안 가꾸었던 모든 전각이 흙더미에 휩쓸리고 파뭍혀버려 폐사되고 말았다. 그런 선림원터가 지금의 모습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은 선림원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그 위치를 찾아 1986~1987년에 문화재발굴조사에 의하여 파뭍혀있던 석조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현재 선림원터에는 신라석탑의 원형과 같은 형식과 체감을 잘 갖춘 삼층석탑과, 이곳에서 깨침의 사자후로 명성을 날렸던 홍각선사의 비와 그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부도의 기단부분과 선림원의 석등 만이 남아있다. 기타 옛 자취가 너무 없어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깊은 산속이었기에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의 피해는 받지 않은 듯, 석조물들의 훼손은 많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다.

 

석조물을 돌아보며 그래도 아쉬움이 있다면, 스님의 승탑으로 남겨진 부도가 사리를 모셨을 윗부분은 찾지 못하고, 아랫부분인 기단만이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스님의 승탑은 선종의 선사들을 위하여 만들게 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선림원터의 승탑기단부분은 국내 많은 승탑들 중에서도 그 조각상이 매우 화려하고 생동적인 모습으로, 구름속의 용들이 꿈틀대는 모습이었다.  홍수의 산사태로 무너져 뭍혔다면 이곳 어딘가에 깊숙이 뭍혀있을 것인데 언젠가 되찾아 제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싶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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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