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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선조, 인원왕후 언문(한글)으로 교지를 쓰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449]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후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심지어 공식 문서인 교지에도 언문을 썼습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諺書)로 방문(榜文,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백성을 알아듣도록 하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숙종의 제2계비로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5)는 1726년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임금을 즉위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원왕후는 아버지 김주신과 어머니 가림부부인 조씨에 대해 회고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선군유사》와 《선비유사》를 언문으로 써서 현존하는 유물이 얼마 없는 왕실 여성의 한글 문집으로 값어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조선시대 내내 한글은 푸대접이 아니라 제2의 공식글자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