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제주신사가 들어서 있던 곳을 말하려면 먼저 제주측후소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1923년 일제는 옛 제주읍성의 쾌승정을 헐어버리고 그 터에 제주측후소(현 제주기상청)를 지었다. 제주읍성은 석성(石城)으로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처음으로 축성되었는데 1599년 성유문 등 여러 제주 목사들이 증개축을 하여 구한말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1910년 총독부의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점차 훼손되었다. ▲ 제주측후소 바로 옆 제주읍성 자리에 제주신사를 지었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에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공사를 벌였는데 당시 바다 매립을 위한 용도로 역사적인 제주읍성을 헐어냈다. 제주읍성이란 요즘으로 치자면 제주시청과 같은 구실을 하는 곳으로 제주시의 핵심 행정관청인 것이다. 이러한 행정관청을 조선총독부는 마구잡이로 헐어 버리고 난데없는 기상관측 시설을 지어 버린 것이다. ▲ 제주지방기상청 앞에서 바라본 제주신사 터(제주중앙감리교회 자리) 뿐만 아니라 일제는 현재 제주기지방상청과 제주중앙감리교회 사이에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펴기 위해 1928년 제주신사(濟州神社)를 지었다. 2009년 1월 5일치 한라일보에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어두운 암흑기 임시정부의 횃불 '연미당' 이윤옥1938년 5월 6일 밤 창사 남목청 6호삐걱거리는 낡은 목조 건물 이층 회의실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모여독립 꿈꾸며 머리 맞대던 그때탕탕탕타앙... 타..앙...변절자 이운한이 꺼내 든 권총슬픈 내 동포 손에 총 맞아현익철이 절명하고 백범 선생 관통상 입어사경 헤매는 겨레 스승 부축이며독립의 날개를 꿰매던 이여때로는 씩씩한 목소리로 광복군 소식 알려피 끓는 동포애 북돋우고때로는 광복진선 청년공작대원 되어고난 속에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난 이여장강의 물길 따라 떠돌던 임시정부독립의 선봉자 남편과 광복군 딸 어깨동무하고더 큰 투지로 임시정부의 횃불 된 이여. 연미당(延薇堂,1908.7.15~1981.1.1)연미당, 이복영, 김정숙 등이 안창호 선생 추도회에서 애도가를 불렀으며 추도식장 안은 비분강개한 분위기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는 1938년 6월 30일 신한민보 기사로 연미당이 30살 때의 일이다. 일명 충효(忠孝) 미당(美堂)으로 불리며 경기도 여주 출신인 연미당은 이보다 앞서 22살 때인 1930년 8월 중국 상해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이 조직되었을 때 5명의 임시위원 중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한글로 인포메이션이라고 하면 유식해지나? 미국인을 위한 것이라면 영어로 쓸 일이지... 그것도 서울의 한복판 세종대왕을 기념하는 세종문화회관 지하 고급 식당가에 이런 안내소가 있다니 우습다.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있던 곳,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한산도에 있는 제승당(制勝堂)에 가면 더욱더 충무공의 그때 그 심정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1593년 8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아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을 설치했을 때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막료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하는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폐허가 된 이곳에 제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1740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면서 운주당 옛터에 다시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 이름했는데, 지금 걸려 있는 제승당(制勝堂) 현판은 제 107대 통제사 조경이 쓴 글씨이다. 충무공은 이곳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 삼아 당포승첩(唐浦勝捷)후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하여 적군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전의(戰意)에 큰 타격을 준 곳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당시의 상황을 연상케 하는 땅이름이 여러 개 전해지고 있다. ▲ 굽이길을 걸어 제승당으로 가는 길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조선여성의 애국사상을 일깨운 개성의 꽃 권애라 이윤옥 죽치(竹稚), 휠지언정 꺾이지 않는 대나무를 닮은 임이시어 국경의 칼바람 눈보라 살을 에는 혹한의 만주 땅 칠흑같이 어두운 밤 쫓기며 맹수들 두려워 않고 찾아간 독립운동의 성지 동삼성 지하 항일운동 앞장서다 잡혀 악랄한 비밀감옥 모진 고문 지치기도 하련만 끝내 이겨내고 돌아온 조국에서 잠자는 조선여성 일 깨워 광복의 두 글자 가슴에 깊이 새겨준 이여 오늘 조국은 임의 이름 잊었지만 역사는 질긴 날실과 씨실로 임의 이름 석 자 새길 것이외다. *죽치(竹稚)는 권애라 애국지사의 호이며 어린 싹인 죽순(竹筍)과 달리 어려도 심지가 곧음을 나타내며 이러한 호는 권애라 애국지사의 삶을 잘 나타낸다. ▲ 1925.10.11 동아일보 권애라 기사 권애라(權愛羅 1897. 2. 2 ~ 1973. 9.26)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1일 충교(忠橋) 예배당의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면서 어윤희(漁允熙)애국지사와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날 호수돈여자보통학교(好壽敦女子普通學校)로부터 전달 받은 독립선언서 80여장을 들고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일경에 잡혀 5월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 일본 개호의 날 질문:아버지(64세)가 2009년 1월 15일에 왕복 4차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건너던 중 1차 선에 멈춰선 차를 보고 건너시다 승합차에 치이셨어요. 중환자실에 3주간 계시다가 일 반병실에서 치료중이십니다 보험회사와 합의 때 주의점을 알려주세요. 답변:보험회사에서는 식물인간이나 사지마비 환자가 아닌 한 개호비를 인정해주지 않지 만 법원에 소송시 부상정도와 입원기간 등을 고려하여 개호비를 인정해 주고 있 습니다. 법원을 통한 신체감정결과 개호가 인정된다면 남은 여명기간 동안의 개호비 를 모두 청구하실 수 있습니다. 정확한 진단명을 알면 개호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 다. -다음- 교통사고 환자인 아버지의 합의금에 대한 질문이 인터넷에 올라있다.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사람은 말끝마다 개호를 말하고 있다. 간호라는 말은 흔한 말이지만 개호는 좀 낯설다. 그러나 요즈음 상당히 많이 일상에 침투된 느낌이다. 개호용품같은 말도 흔히 쓰인다. 대체 이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일까? 《국어대사전, 삼성출판사, 1991년 》판에 개호:돌봐줌이라는 말이 올라 있는 것을 보니 이 이전부터 쓰이던 말 같은데 부쩍 요즈음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신사숭경(神社崇敬)은 실로 일본의 국체관념(國體觀念)의 반영이다. 신사에서 봉납되는 제사는 황국국체(皇國國體)로 이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이한 일이다. 일본민족은 개국 이래 신사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왔다. 신사는 일본민족의 향토생활의 중심인 것이다. 이러한 신사는 본토를 떠나 멀리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정신생활의 중심이다. (중략) 올해로 성전(聖戰) 5년에 접어들어 지금 일본민족이 전면적으로 대륙으로 진출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목표 아래 흥아(興亞)의 대업완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며 신사는 일본의 대륙진출의 중심지이다. 위는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만든《대륙신사대관, 1941》머리말에 나오는 말로 조선 내에 신사를 만든 이유를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슨 까닭인지 1940년(소화 15) 11월 현재 전국 13도 가운데 유독 전라남도에만 신사를 많이 세웠다. 전국의 신사 신사(神社) 신사(神祠) 경기도 5 67 충청북도 2 16 충청남도 7 30 전라북도 10 20 전라남도 8 226 경상북도 5 47 경상남도 7 37 황해도 2 27 평안남도 2 21 평안북도 4 37 강원도 2 35 함경남도 2 20 함경
[그린경제 =이윤옥 기자] 광복군 뒷바라지한 만주의 어머니 정현숙 이윤옥 죽능골 어린 신부 봉숭아 물들이며 뛰어 놀던 앞마당 뒤로하고 붉은 꽃 가슴에 새기고 떠난 만주길 물설고 낯선 곳에 마음 둘 곳은 내동포 내형제 지키는 일 그것뿐이라 하루에도 열두 가마솥 뜨신 밥해서 광복군 주린 배 채우며 다독이던 몸 왜놈에 쫓기어 뿔뿔이 흩어진 가족 부평초처럼 떠돌던 임시정부시절 토교에 천막치고 거친 밥 먹을지언정 광복의 끈 놓은 적 없어 고이 키운 어린 딸 손잡고 함께 부른 광복의 노래 그 누가 있어 해주오 씨 문중에 출중한 여장부 며느리 기억해줄까? ▲ 정현숙(일명 정정산) 애국지사 정현숙(鄭賢淑, 정정산, 1900. 3.13 ~ 1992. 8. 3) 토교에서 정씨(정현숙 애국지사)는 홀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중략) 영걸어머니(정현숙 애국지사)는 고생이 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열걸 어머니에 정을 쏟고 희영이나(큰따님) 희옥에게(작은 따님) 좀 더 잘해주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영걸어머니는 만주에서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관동의 오래된 절 심대사와 오미쿠지의 창시자 원삼대사, 큰스님 만공상인의 조부모 사당 고하쿠신사와 조후시(調布市) 일대는 고대 조선인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밝히고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지 일본사람들이 밝혀내어 널리 알려줄 리가 없다. 오히려 있는 것을 감추고 없애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그런 기대는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답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무사시노 평야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집들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본다. 해가 지고 온 세상이 어두워지면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태양이 떠오르면 초원 위에 펼쳐지던 평야와 그 평원 위를 달리던 용맹의 상징 고구려 후예들과 뛰어난 선진문화의 전달자 백제와 신라인들의 영원한 로망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언제까지나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빌어본다. 이 글은 2010년 1월 23일 답사글이다. 고구려 총각 복만 씨의 전설과 마귀 쫓는 원삼대사의 전설로 잘 알려진 심대사(深大寺)는 관동지방의 천년고찰로 도쿄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사이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 지금은 그저 묵묵히 전주시내를 굽어보고 있지만 전주 사람들에게 다가산은 눈물같은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다가산 정상에 세워진 신사를 참배하기 위해 닦아 놓은 이 길을 참궁로(參宮路)라 하였다. 곧 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길이라는 의미인데 다가교를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라는 의미의 대궁교(大宮橋)라고 이름 지은 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주신사(神社)가 있던 다가공원 중턱 팻말에써 놓은 글이다. 역시 역사의 고장 전주다웠다. 남원신사, 인천신사, 나주신사 터에서는 못보던 것이었다. 다가공원 입구 등나무 의자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전주신사가 있던 곳을 물으니 앞 다투어 선뜻 길을 안내 해준다. 다가공원 꼭대기가 그 자리라면서 산꼭대기로 오르는 중턱에 표지판도 있다고 친절히 가르쳐주는 것이다. ▲ 다가산중턱에 세운 팻말 어르신들이 가르쳐준 공원 꼭대기를 향해 발길을 돌리자니 크고 작은 돌비석들이 나란히 줄지어져 있다. 이 지방 유지들을 위한 공덕비 같았다. 공덕비를 보면서 오른쪽으로 돌아 산마루로 오르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고 오른편에는 활터였다. 어르신들이 일러준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