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 한목숨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때에도 일제에 아부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친일파,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항변한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어쩔수 없이 친일했던 것이며, 나름대로 조국의 근대화에 상당한 공헌을 했노라고...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선각자로 어렵지만 독립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던 분들이 있다. 그 가운데 불교의 스님으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이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3월 1일 맨손에 태극기만을 들고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에 앞장서 독립선언서의 기초에도 관여했고, 그 부칙으로 '공약삼장'을 더함으로 한민족의 독립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가를 역설했으며, 독립만세운동의 의미와 각오를민족을 대표로 나선 이들이 스스로 다짐하게 했으며 그 뜻을전세계에 전했다. 3ㆍ1만세운동을 무사히 마친 뒤 만해는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차가운 형무소에 갇혀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그리고 형무소 간수들에게 감화를 주면서 만기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2 중순이지만 겨울 추위가 좀 뜸해서 서울성곽 동쪽에 있는 혜화문을 거쳐 성곽길을 걸어보았다. 혜화문은 본래 현재 서울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대로의 중심에 있었던 문이나, 일제강점기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없어졌전 것을 본래 혜화문위치에서 벗어난 언덕위에 복원한 성의 문루이다. 본래 위치에 세우려면 도로의 양 옆에 있는 성곽을 콘크리트 다리로 잇고, 그 위에 혜화문을 다시 이전해야 할 것이다. 복원된 혜화문을 돌아서 서울 성곽길을 따라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 언덕에는 많이도 훼손되었던 성벽들을 부분적으로 복원하였고, 성벽의 외부에는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들어선 민가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성벽을 따라가다보면 성곽의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오고 갈 수가 있는데, 이를 따라 오르다가 암문에 이르러 외부로 나오면 성북동 북정마을이 있다. 그 마을의 민가 가운데성북동 심우장이 있다. 심우장은 일제감점기 불교의 스님으로 민족시인으로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만해 한용운스님이 집을 짓고 살던 집이다. 심우장이란 스님들이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아 떠나서 가진 고생 끝에 소를 찾고 이를 길들여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위 사진들은 경복궁 옆 고궁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전시품들이다. 지금은 많은 기계들이 발명되어 아무리 큰 집이라도 쉽게 지을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조들은 조선의 대궐뿐 아니라, 그 이전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그 이전에도 거대한 궁궐들을 지어냈다. 그 중에는 80m가 넘는 황룡사9층탑이나, 미륵사9층탑도 이러한 도구들 만으로 지어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현재 전시중이므로 한 번 시간 내면 옛 선인들의 노고와 지혜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기간 : 2016년 12월 6일 부터 2017년 2월 19일 장 소: 경복궁 입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양주 장흥 석현리 계명산 자락에자리 잡은대승사는 본래 서울에 있다가 1968년 이전하였으며, 대웅전은 1980년대 지었다. 양주 장흥 관광지역에 인접하고 있으며 대웅전 관음전 종무소, 요사채 등이 있고, 대웅전 옆에는 적상으로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서원한 스님머리의 지장보살이 6환장을 들고 있다. 경내 대웅전은 팔작지붕을 한 건축물로 화려한 다포집에 금단청을 하였다. 절의 대웅전은 궁궐의 정전보다도 화려하게 꾸미는데, 그 까닭은 대웅전의 주인인 부처님은 세상의 임금보다 더 귀하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회 탄핵은 이루어졌지만, 방심할 수 없다는 국민들의 염원을 담아., 날씨도 추운 12월 중순임에도 국민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추운날, 혼자라면 더 추울 것이지만, 함께한 광장은 서로가 촛불을 켜들고서로를 껴안으니 작은 촛불이 훈훈한 날로가 되어 춥고 어두운 밤을 밝힐 수가 있었다. 국회 탄핵의결로 마무리 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고난의 길이 있음을 이제 국민들은 알고 있다. 자칫 추위에 촛불의 힘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또 다시 국민의 뜻을 왜곡하고 나설지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 많은 국민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광화문 추운 돌바닥에 손에 손을 잡고 촛불로 불을 밝히는 모습은 한국민이 얼마나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제 전 세계인이 시위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고 있다. 이 장엄한 국민들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행동에 감동과 찬사가 쏟아지고 있으며,그 현장에서 취재하는 기자 또한 시대의 증인으로 참석하고 있음이 감개무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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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왕흥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백제의 절이다, 왕흥사의 창건은 백제 법왕 2년 (서기600년) 공사를시작하여 무왕 35년(서기634년)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왕흥사지는 백제가 멸망한 뒤 불에 타 절의 전각이 사라지고, 이후 땅속에 묻혀서 잊혀진 절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옛 기록을 근거로 부여 근처를 수소문하여 절터로 추정된 곳에서 왕흥(王興)이라 쓰여진 기와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왕흥사터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 절의 전각이 목조로 되어있었기에,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절 내 가장 높이 솟아 있던 탑도 우리가 탑하면 떠오르는 돌로된 석탑이 아니라 목탑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탑의 흔적도 없었다. 당시에는, 석등 또한 돌로 만들지 않았었다. 사찰의 중심에는 등조차 목등이었기 때문이다. 발굴된 사리자엄구 겉에 쓰여진 글자를 해석해보면 577년 초기 "백제 위덕왕이 죽은 아들인 왕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어렵게 사리를 구하여 절을세우기 시작했다."고 쓰였다.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흥사는 백제 법왕2년*600년) 착공하여, 30여년의 역사 끝에 무왕 때에야 완성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고대 한민족 곧 부여족의 하나였던 백제인은 고조선이 분화되면서 생겨났던 북부여국에서 떨어져 나와한강유역에 자리잡고 초기 백제국을 세웠다. 그 즈음 만주지역에 자리잡은 것은 고구려였다.백제는 졸본부여사람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세웠다고 하며, 그 시기는 기원전 18년 무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 정착지에 대하여 여러 이론이 있으며, 그 국가로서의 성립은 한강유역이었을 것으로 거의 확정하고 있다. 그 백체 초기유적이 현재 서울 송파구 와 하남시 미사리에 걸쳐 있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이성산성, 춘궁리 유적등이다. 그런 백제는 중국의 요동반도 서쪽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지배했었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 양서, 남사, 진서 등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백제는고구려의 남하에 밀려 475년 문주왕때 남쪽으로 밀려나 재기를 꿈꾸었으나,다시 재기하지 못하고서력기원 663년 백제는 신라가 끌어들인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패하여 공식적으로 그 나라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 때, 동아시아의 해상세력으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두루 주름잡던 백제인들은 한반도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곡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한민족은 그 바람 앞을 피해서바람불지 않는 굴속으로 도망치는 대신 작은 등불을 모아서 밝히고 태풍과도 같았던 역사의 현장에서 분연히 일어섰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서기1200년 당시 이미 그 누구도 대항해볼 엄두를 내지 않았던세계제국이 된 몽골의 기마병 앞에서 3차례끈질긴 저항으로수 십 년 동안 버티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도망쳐버린 임금과 관군을 대신하여 스님들과 뜻있는 선비들 그리고백성이 들고 일어나 싸움으로 평생을 살아오던 일본의 사무리이 정예군에 감히 맞서서 저항하였다. 그런 끈질기고 기백에 찬 백성들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이순신 장군이 천하명장이라 하더라도 어찌 12척의 전함만으로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승리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또조선 말, 세계정세에 눈 어두운 조선의 임금 이하 관료들이 나라의개혁은 커녕 자신들의 특권과도 같았던권력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을 때, 그런 나라를 살리고자 나섰던 사람은 다름아닌 한낱 민초와도 같았던 몰락양반최제우였다. 그는 본래 우리 민족에게 깊이 간직되어 있었던 고조선 이래 민본사상인한사상과 동양의 여러 종교 철학에 서양에서 유입된 서학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푸르던 산야의 초목들 중 사계절 늘푸른 상록수를 제외한 초목들은 이제몸통과 가지가 그대로 다드러난 초겨울이 되었다.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또한 한조각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라는 선사들의 선시가 귓가에 맴돌지만, 중생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조각 구름이 뭉쳐서 떠돌다 한줄기 빗방울이 되어 초목에 싱그러운 삶의 영양소가 되어도 주고, 그리고 남은 물들은 흘러내려 작은 갯가를 이루고 흐르다 절벽을 만나면 계곡에 폭포를 이루고, 끊임없이 흘러서강물이 되었다가 넓은 대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렇게 흘러가다 증발하여 다시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기에 지상의 생명체는 돌고 돌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연의 원리를 체득한 서양의 고대 철학자 탈레스는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이 있기에 모든 생명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조각 구름이 설악산에 부딛쳐 빗줄기가 되어서 설악산의 단단한 바윗돌들을 깎아내어 설악산이 이루어 졌다. 그리고 깎여 내린 바윗돌들은 물줄기에 씻기고 서로 부딛치면서 깨지면서작은 돌맹이를 이루는데 수많은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몽돌들의 계곡인 백담계곡의 돌들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