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시인의 시 일부입니다. 이 시가 새삼 생각이 나는 것은 고등학교 시절 편지에 썼던 기억이 새롭기 때문입니다. 만난 적도 없고 누구인지도 몰랐던 소녀에게 정성껏 펜으로 써서 띄웠던 바로 펜팔 편지. 우리는 이쁜 그림을 그려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 빠알간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편지에는 라이너마리아릴케, 헬만 헷세가 등장했고, 온갖 미사여구를 쥐어짜내 썼었지요. 어떤 친구는 당시 유행하던 칸쪼네 질리오라 칭케티의 노래 “노노레타(나이도 어린데)”를 정성스럽게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여 봉투에 함께 담기도 했습니다. 주로 연하의 여성 또는 연상의 남성을 상대로 펜팔을 했지만 누나가 없던 남성은 연상의 여인을 상대로 쓰기도 했지요. 펜팔은 나라 안 사람뿐만이 아니라 어쭙잖은 영문편지로 나라밖 외국 사람들에게도 쓰기도 했습니다. 잡지나 노래책 뒤에 펜팔 모집 광고가 나오면 거기서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이 날은 밤낮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해가 진 뒤에도 얼마간은 빛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낮이 좀 더 길게 느껴집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것은 중용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실제 느끼는 것은 그와 다를 수 있음도 알아야 하지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이날 빙실(氷室, 얼음창고)의 얼음을 꺼내 쓰기 전에 북방의 신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사한제(司寒祭)”라는 제사를 올렸습니다. ≪고려사(高麗史)≫ 권63 지17 길례(吉禮) 소사(小祀) 사한조(司寒條)에 “고려 의종 때 상정(詳定)한 의식으로 사한단(司寒壇)은 맹동과 입춘에 얼음을 저장하거나 춘분에 얼음을 꺼낼 때에 제사한다.”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춘분에는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농부들의 손길도 분주해집니다. 논밭에 씨앗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천수답(天水畓, 천둥지기)에서는 귀한 물을 받기 위해 물꼬를 손질하는데 이때에 비로소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춘분 앞뒤로는 많은 바람이 붑니다. 그래서 “2월 바람에 김칫독
어떤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는 한국에 오면 창덕궁에 가야 한국을 흠씬 느낄 수 있다며, 창덕궁 가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다섯이나 되는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정궁인 경복궁을 제쳐두고 창덕궁을 한국적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창덕궁이 동북아시아의 궁궐 가운데에 보기 드물게 친자연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과 창덕궁 뒤 후원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은 절집이나 한옥 등이 모두 땅 모양에 맞춰 지었는데 창덕궁 역시 땅 모양에 맞게 지었지요. 경복궁은 정문인 근정전에서 주산인 백악을 관통하는 중심축이 있어 그에 맞게 일직선으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이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창덕궁은 돈화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어야만 인정전인 나옵니다. 여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가야만 희정당과 대조전이 나오지요. 더구나 인정문의 앞마당은 네모꼴로 하지 않고 사다리꼴입니다. 주변 땅 모양에 맞추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창덕궁의 특징은 이보다 후원의 아름다움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집에서 애 하나 똑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뭐했어.” 어떤 가정에서 나오는 큰소리입니다.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짜증을 낸 것입니다. 물론 요즘 젊은 부모들은 많이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젖은 아버지들은 보통 그렇게 자식의 잘못에 대해 마치 어머니만의 책임인 것처럼 나무랐습니다. 그럼 조선시대 아버지들도 그처럼 자녀양육의 책임을 어머니에게만 맡겼을까요? “아이가 학업에 소홀하여 나무랐는데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잠시 후 일어나 나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동문 밖에 나갔다. 곧바로 종을 보내 불러오게 했는데 돌아온 뒤 사립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들어오지 않았다. (중략) 묵재가 그 불손함을 꾸짖으며 친히 데리고 들어오면서 그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다섯 번 때렸다. 방에 들어오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에 손자가 엎드려 울었다.”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문건(李文楗, 1494∼1547)이 쓴 《양아록(養兒錄)》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문건은 손자를 가르치며,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렸습니다. 물론 지나친 감정의 체벌은 아닙니다. 하지만, 때린 뒤 손자가 한참을 엎드려 울자 자신도 울고 싶은 마음뿐이라 고백합
“오십견 치료 중 며칠 전 아우 '라온'이 공기놀이를 추천했다. 한의원에서 침 맞고 나오면서 앞집 문구점에 가서 만원 내고 5백 원짜리 공기를 샀다. 그야말로 '살구'다. 높이 멀리 뿌릴수록 팔이 많이 움직여진다. 나는 어렸을 때, 펄쩍 펄쩍 발로 뛰는 고무줄놀이는 못했어도 한자리 앉아서 하는 공기놀이만큼은 잘했다. 그런데 이제 옛날 같지 않다. 잘 안 된다.” 위 글을 쓴 사람은 오십견을 치료하기 위해 어렸을 때 즐겼던 공기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예전 우리 어렸을 때는 공기놀이를 하고 싶은 아이가 먼저 “공기놀이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라고 외치면서 엄지손가락을 곧게 세우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았지요. 그러면 이내 아이들이 몰려들면서 함께 “공기놀이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를 합창했지요. “공기놀이”는 다섯 개의 조그맣고 동그란 돌을 가지고 노는 여자 아이들의 놀이입니다. 물론 남자 이이들이 하기도 했지요. 둘이나
경주라고 하면 불국사를 떠올리듯 우지차 (宇治茶)로 유명한 우지시(宇治市)의 명소를 꼽으라면 단연 평등원(平等院, 뵤도인)을 들 수 있다. 평등원은 부처님을 모시는 절인데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 봉황당(鳳凰堂) 건물은 1,0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교토의 문화재 (古都京都の文化財)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양식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한다. 봉황당 앞에 파 놓은 아담한 연못이 마치 거울같이 투명하여 물 위에 비친 봉황당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봉황당 주변의 정원 역시 잘 꾸며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봉황당은 원래부터 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권력자인 후지와라 (藤原道長)씨의 별장이었던 것을 1052년에 절로 쓰면서 평등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평등원이 지어질 무렵의 일본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 말기로 정국은 혼란하였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말법사상이 자리하여 극락왕생과 정토신앙이 확산되던 때이다. 말법사상(末法思想)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법(正法)이 행해지는 시대를 지나 껍데기로만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깨달음이 없는 시대인 상법(像法) 시대를
속풀이 97에서는 사육신과 거문고 관련 이야기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끝끝내 반대하다가 육시를 당한 사육신과 거문고에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사육신의 대표적인 인물, 성삼문과 박팽년의 집에는 손수 심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서로 바라다 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두 대감의 집안이 전복되고 육시(戮屍)될 때, 처참한 광경을 처음부터 오로지 보아왔다. 시간이 흘러 단종의 복위와 함께 사육신들도 그 결백함이 밝혀졌으나 두 대감집의 소나무도 수명을 다 하였다. 선군께서 이 두 소나무 목재를 얻어 합하여 거문고를 만드시고, 쌍절금(雙節琴)이라 이름 짓고 연주해보니 뛰어난 소리를 냈다. 유심히 들어보니 맑고도 굳센 음색은 곧은 두 대감의 성품이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충신의 집을 지키던 소나무도 주인의 성품이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그 재료로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일반 거문고와는 달리 음색이 강렬하고 굳세다는 이야기이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거문고만큼 상류 사회, 지식인 계층의 애호를 받은 악기도 드물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대부분의 고악서(古樂書)나 옛 악보들이 모두 거문고 악보임을 보아도 쉽게 짐작 할 수
석달은 길었던가 아흔날이 달다는가 땅벌레 솟아 오른 겉땅은 다 봄이니 이윽고 돌아온 제비 보금자리 벼르느나. * 겉땅 : 땅바닥, 땅 표면, 지상
오마이뉴스 2004월 1월 23 치 “투수야말로 야구의 진정한 공격자”라는 기사에서 기자는 야구에서 투수가 수비수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거센 공격자이며, 경기의 목대잡이를 맡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대잡이”란 무엇일까요? “목대”는 멍에 양쪽 끝 구멍에 꿰어 소의 목 양쪽에 대는 가는 나무를 말합니다.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내리막길을 갈 때 소의 고삐를 단단히 죄면서 뒤로 버텨주지 않으면 수레에 가속도가 붙어서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고삐 잡는 일을 목대잡이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목대잡이”는 또 다른 뜻으로도 쓰입니다.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일을 하는 것을 “목대 잡는다”고 하며, ‘목대를 잡는 사람’을 ‘목대잡이’라고 합니다. 외국말인 ‘리더(leader)’에 갈음하여 쓸 수 있는 훌륭한 토박이말이지요. 박남일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에는 “미래에는 숭고한 도덕성과 뛰어난 상상력을 두루 겸비한 사람을 사회의 목대잡이로 내세워야 한다.”라는 예문이 보입니다. 이 시대에 어디 뛰어난 목대잡이 없나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 퀭한 눈 올려다 본 흐린 천장에 /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 꽃다지눈 감아도 보이는 수많은 얼굴 /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 흐린 천장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 위 노래는 노래패 〈꽃다지〉가 부른 '꽃다지' 노랫말입니다. 꽃다지 노래패가 나오기 전까지는 꽃다지라는 들꽃이 있는 줄 우리는 몰랐습니다. 봄이 되면, 아니 봄이 되기 전 눈이 채 녹지 않은 들판에선 여기저기 수줍은 들꽃들이 고개를 내미는데 얼음새꽃으로 시작하여, 앉은부채, 너도바람꽃, 노루귀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꽃다지”란 꽃도 있는 것이지요. 꽃다지는 화려하지도 않고, 그다지 예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이놈은 꽃만 보면 더더욱 별 관심을 끌지 못할 잡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지요. 그러나 노래패 꽃다지는 자신들의 이름으로 꽃다지를 선택했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왜 일까요? 그들은 말합니다. “꽃다지는 노란 꽃잎을 가진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꽃입니다. 그러나 이 꽃들은 함께 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