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한 자락 건져 올렸느냐 / 미역 한줄기 겨우 건졌고나 / 굴 전복 한 망시리 건져들고 / 태평가 부를 날 고대해도 / 불턱에 부는 바람 / 아직 차더라 - 정연지 ‘망시리’- 망시리는 제주도에서 해녀들이 바다에서 뜯은 해산물을 집어넣는 주머니를 말하는데 망아리라고도 부릅니다. 예전 망시리의 재료는 짚이나 억새의 속잎, 자오락(짚처럼 생긴 풀) 같은 것으로 만들었지만 요즘은 나일론으로 바뀌었습니다. 망시리는 태왁(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 쓰는 물에 뜨는 도구)의 아래쪽에 연결되어 있으며 길이는 70㎝, 폭은 55㎝ 정도이지요. 망시리는 미역을 담으면 미역망시리, 전복이나 소라 따위를 담으면 헛물망시리라고 하며, 문어나 오분자기(조개 종류), 배말(삿갓조개)들을 담는 것으로 작고 짜임새가 매우 촘촘한 조락이란 것도 있습니다. 망시리는 땅바닥에 놓지 않고 반드시 걸어 두는데 물에 젖은 망시리를 땅바닥에 놓아두면 쉬이 썩기 때문입니다. 망시리는 해녀들이 길일이라 여기는 개날[戌日]에 주로 만들며, 다른 사람이 망시리 위로 넘어 가면 재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물론 상
“기댈 수 있는 기둥이나 벽만 나오면 우리는 으레 말뚝박기를 했다. 그런데 가위바위보를 못하는 녀석과 짝이 되면 늘 말이 되어야 했다. 또 상대편에 덩치 크고 뛰어오르기 잘하는 녀석이 있으면 이건 완전 죽음이다. 오늘은 말만 했지만 내일은 가위바위보를 잘 해 신나게 말을 타봐야지.” 예전 컴퓨터가 없던 시절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말뚝박기를 했습니다. 지방에 따라선 말타기”라고도 했던 이 놀이는 남자아이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한 쪽은 말이 되고 다른 한쪽은 이 말에 올라타고 노는 놀이였지요. 먼저 양쪽에서 각기 대장을 뽑아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 쪽이 말이 되는데 대장이 담 벽 같은 데에 기대서고 어린이들은 허리를 굽힌 자세로 앞사람의 허벅지를 꽉 붙잡고 잇달아 말이 되었습니다. 이긴 쪽 아이들은 차례로 멀리서부터 달려와 앞쪽으로부터 말을 타나가지요. 이 때 말이 쓰러지면 몇 번이고 새로 말을 만들어야 하며, 말을 타다가 한 사람이라도 떨어지면 그 쪽이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을 타는 쪽에서는 어떻게든지 말을 무너뜨리려고 일부러 험하게 말을 타는데 말은 무너지지
1392년 조선개국과 함께 창건된 경복궁은 이후 경회루, 자선당, 흠경각 등의 크고 작은 전각을 추가로 지어 명실상부한 궁궐의 면모를 보였으나 1900년대의 민족 수난기를 맞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흉물스럽게 들어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광복이후 여러 논란 끝에 1997년 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2000년부터는 경복궁 복원 사업이 이뤄져 2006년 건청궁의 복원 등 본래 모습을 하나둘씩 찾아가는 모습이 다행스럽다. 일본에서 지인들이 오면 반드시 들르는 이곳에 서면 경복궁의 쓰라린 역사를 새기지 않을 수 없다. 1915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1910년 8월 29일)된 지 5년째 되는 해로 일제는 이 “조선통치 5년”을 기념하기 위해 2년 전부터 골똘한 궁리에 들어간다. 궁리 끝에 1913년 “통치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행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1913년 제국회의에서 예산을 책정하여 장소를 경복궁으로 정하는 총독부 고시령을 1913년 8월 6일 내린다. 조선물산공진회란 한마디로 박람회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을 박람회장으로 꾸며 더 이상 궁궐에 대한 미련을 두지 못하도록 철저한 계산 하에 궁궐 파괴에 몰입한 것
일본의 3월 3일은 히나마츠리(雛祭り)라고 해서 여자 아이를 둔 집안의 잔칫날이다. 이날 여자 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히나인형을 장식하는 데 이 히나인형은 장차 아이에게 닥칠지 모르는 사고나 질병 또는 나쁜 액을 물리치는 뜻에서 장식하는 것이다. 보통 히나인형의 장식 시기는 입춘 무렵부터이며 늦어도 2월 24일까지는 장식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미난 것은 3월 3일이 지나면 집안에 장식해 두었던 히나인형을 재빠르게 치워야하는데 적어도 3월 중순 까지는 치워야한다. 꾸물거리다가 날짜가 늦어지면 장차 딸아이의 혼사가 늦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일본에 있을 때 필자는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에 있는 친구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그 집 딸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마침 히나인형을 장식한다고 해서 함께 거들었다. 사이타마의 주택들은 도쿄 보다는 공간이 제법 넓어 거실에 3단 정도의 히나인형을 장식해놓을 수 있었는데 이에 견주어 도쿄의 경우는 방도 좁고 거실도 좁아 3단 짜리 히나인형을 놓을 공간은 없다. 친구 딸과 나는 커다란 히나인형 상자에서 인형을 꺼내 붉은 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인형들을 장식해 나갔다. 가장 윗줄에는 왕과 왕비를 상
“러일전쟁은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전쟁이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는 러시아도 중국도 아닌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우리 중·고교 교과서는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다.” 이는 “다시 보는 러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이경재 씨가 2012년 8월 27일 전북일보에 쓴 글이다. 엊그제 2월 10일은 한국 고유의 명절이었으나 이날은 109년 전 러일전쟁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고유의 명절이 지난지도 얼마 안 되는데 하필이면 러일전쟁 이야기를 들쑤셔 내느냐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오늘은 이 러일전쟁 때 생긴 약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금도 하나의 고유명사로 쓰일 정도로 입지를 굳힌 배탈설사, 위장약이 있는데 “정로환(征露丸, 세로칸)”이 그 약이다. 설사 멈춤 약으로도 알려진 정로환은 일제국주의가 한창 팽창하던 때인 1905년 일본에서 러시아로 파병하는 병사의 설사병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 만주에 파병된 일본병사들은 원인모를 병에 걸려 하나둘 죽어 나갔는데 이를 보다 못한 일본정부는 그 원인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 결과 만주의 나쁜 수질 곧 물갈이로 인해 설사병이 났다는 결론에 이르게
도쿄에는 오래된 서점가가 있는데 간다진보쵸(神田保町町)에 있는 고서점가가 그곳이다. 도쿄에 있을 때 필자는 시간만 나면 이 거리에서 하루 종일 책 구경을 하며 지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싼 책은 10엔짜리부터 좀 비싸다고 해도 1천 엔 정도면 사고 싶었던 책을 손에 쥘 수 있어 부담이 적은 곳이다. 책이란 비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을 만났을 때 기쁜 것이기에 필자는 쓸쓸할 때나 우울할 때, 기쁠 때나 심심할 때 등 틈 만 나면 이곳 서점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좋은 책을 발견하고는 밤새도록 독서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우리나라에도 청계천일대에 헌책방가가 있긴 하나 일본 간다의 고서적 거리와는 좀 다르다. 그것은 “헌책방”과 “고서적”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이미지만큼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물론 간다의 고서점가에도 싼 책들이 즐비하지만 가게에 따라서는 3~400년 된 고서들도 많은데 그 값이란 몇 십만 엔에서부터 몇 백만 엔씩 하는 것도 있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때도 많다. 일본의 유명한 고서적 거리인 ‘간다지역’은 명치10년(1880) 때부터 이 지역 일대에 들어선 명치대학, 중앙대학,
- 이하라사이카쿠의 ‘한국판 장화홍련전’과 비슷한 이야기 - “예전에 히다(지금의 기후현 북부)지방에 한 무사관리가 있었다. 어느 날 이 관리가 산길을 가다가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이르렀는데 한 선인(仙人)이 길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쫓아가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그래도 자신이 무사인데 그냥 돌아가기는 뭐하고 해서 선인이 간 발자국을 따라 가다보니 큰 바위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무사관리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깜깜한 동굴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안쪽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약간 밝은 빛이 보여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맑은 물속에 빨간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지 않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안쪽으로 4~500미터쯤 더 깊숙이 더 들어 가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황금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금은보화와 백옥으로 장식된 건물이 즐비했다. 자신이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는 분명히 한겨울이었는데 그곳은 사방에 꽃이 만발하고 종달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이 휘황찬란한 마을을 구경하다 무사관리는 그만 졸음이 몰려와서 한쪽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그 순간 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일본말에 “닛코를 보지 않고는 (일본을) 봤다고 하지마라 (日光を見ずして結構と言うこと莫れ)”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닛코(日光)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관광지이다. 도쿄에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닛코는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3대 장군인 덕천가광(德川家光) 묘는 서기 2000년도에 350년 만에 일반에게 공개했는데 그때 마침 필자는 와세다대학에 있을 때여서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덕천가강의 사당인 도쇼궁(東照宮)은 지은 지 400년이 되었지만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도쇼궁의 정문인 양명문(陽明門)은 일본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일본 국보이다. 또한 도쇼궁 전체(社殿群)는 199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도쇼궁에는 신큐사라는 신위를 보관하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 유명한 3마리 원숭이 조각상이 있다. 지붕 처마 부분에 3마리의 원숭이 상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막은 모습인데 서양에도 "Three wise monkeys"라고 알려져 있을 만큼 유명하다. 봐도 보지 않은 듯, 들어도 듣지 않은 듯,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것은 전통시대 한국의 여성에게도 해당되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신라의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玉寶高)로부터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이 없어 홀로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독학하여 스스로 곡을 짓고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와 옥보고 작품들은 곡명이 전해 오는데, 그 악곡명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또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전해 주었는데, 귀금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자 임금은 윤흥(允興)이라는 고급관리를 남원 공사로 보내서 거문고 음악의 보존, 계승에 전념할 것을 명하였다는 이야기, 윤흥은 자신의 무례를 알아채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예를 갖추어 선생의 음악을 간청한 연후에 표풍(飄風)등 3곡을 전해 받았다는 이야기 등 이었다. 거문고는 6줄로 구성된 악기여서 각 줄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음색의 어울림이 일품이다. 특히 억양을 살린 음색은 더더욱 멋이 있다. 제1현은 문현이라 부르고 마지막 제6현은 무현이라 부른다. 문, 무현 안에 가장 많이 쓰이는 제2현인 유현과 가장 굵은 줄의 제3현 대현이 있다. 특히 제3현의 굵고 낮은 대현의 울림은 거문고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는 줄이다. 유현은 대현보다 완전4도 높게 조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거문고가 고구려시대 처음 전해졌고 왕산악이 대폭 고쳐 만들어 타매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해서 이름을 검은학금으로 지었다가 후에 학자를 빼고 거문고라 불렀다는 이야기와 신라 자비왕 때에 백결선생이 지었다고 하는 대악은 세모에 걱정하는 아내를 위하여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가야금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까닭은 자비왕이 5세기 말엽의 임금이기에 이 시기는 아직 신라에 거문고가 퍼지기 전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거문고가 신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약 200여년이 지난 9세기 말로 보는 것이 각종 자료에 의한 결론이다. 통일신라 이후의 기록에는 신라의 3죽으로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를 들고 있다. 그러므로 거문고는 고구려-신라-고려-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귀중한 악기로 자리 잡아 온 대표적인 현악기인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왕산악이라는 악사가 있어 악기를 고쳐 만들고 곡을 짓고 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 후의 기록이 없어 고구려의 거문고 명인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의 음악조에는 신라의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玉寶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