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집 기본 안주로 많이 나오는 뻥튀기가 가정집 간식거리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고물가에 과자 값이 치솟자 온라인몰에서 대용량 뻥튀기를 구입해 아이들 주전부리 비용을 줄이려는 알뜰 주부들이 늘고 있기 때문. 14일 옥션에 따르면 올해 들어 뻥튀기 등 대용량 과자 판매량이 전년 동기대비 8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과자카테고리 판매량이 11% 성장한 것에 비하면 큰폭으로 증가한 수치다.” 이데일리뉴스 2012년 5월 14일 치 기사 “니들이 강냉이 맛을 알아?..추억의 과자 인기” 일부분입니다. 뻥튀기는 강냉이, 옥시기, 옥새기로도 불리는 옥수수를 튀겨서 만드는 군것질거리로 예전 군것질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 요긴한 군것질거리였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장터 한 구석이나. 공터에서 갑자기 “뻥이야” 하는 아저씨 외침이 들리고 곧이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지요. 그때 뻥튀기의 주재료는 물론 옥수수였지만 쌀이나 가래떡으로도 튀겼습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뻥튀기가 기계에서 쏟아져 나오면 뻥튀기를 살 돈이 없는 아이들은 혹시나 밖으로 튀어나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는 조선 후기의 누정 운조루(雲鳥樓)가 있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8호인 이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류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인 1776년(영조 52) 지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누정인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오미동 유씨 집안 사랑채지요. 운조루에는 두 가지 큰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큰 뒤주입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는 “누구든 이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인데 쌀을 가져가는 가난한 이가 부담스러워 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담겨 있지요. 뒤주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한 개의 구멍에 꽂혀있는 나무를 돌리면 다른 한 개의 구멍에서 쌀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 꽂혀 있던 나무는 도둑을 맞아 지금은 없습니다. 또 하나의 자랑거리자 이 집만의 특징은 굴뚝입니다. 운조루에는 하늘을 향해 쌓아올린 굴뚝이 없으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섬돌 아래에 숨어 있지요. 밥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성군을 꼽으라면 누구나 세종과 함께 영조, 정조임금을 꼽습니다. 이 세분의 임금은 한결같이 백성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분들이지요. 또 이분들은 검소한 임금으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정조는 할머니 정순왕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 그리고 신하들의 기록에서 두루 검소함이 증명됩니다. 정조는 정사를 볼 때 외에는 늘 올이 굵은 무명옷을 기워서 입었고, 자주 빨아 입어서 헤진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었으며, 무명으로 된 요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또 보통 때 밥상의 반찬은 세 가지를 넘지 않았음은 물론 하루 두 끼만 먹었고, 화려하게 조각한 그릇을 쓰지 않았지요. 그뿐만 아니라 거처는 단청도 하지 않았고 비가 오면 새는 그런 몇 칸짜리 건물이었습니다. 그런 거처도 신하가 건물을 수리하려고 하면 “내가 수리비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내 성품이 이런 것을 좋아한다.”며 말렸지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곧 “백성은 만 개의 시내이며, 나는 그 위에 비치는 밝은 달”이라 하여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달빛을 비추는 인자한 임금이 되고 싶어 했던 정조임금,
“하늘은 끝내 굳어버린 기다림을 풀어 봄비로 내리시고 81일 동안 그려온 매화보다 먼저 저 눈밭엔 얼음새꽃이 고개를 내미네 그리하여 그리하여 얼어붙은 줄 알았던 가슴에 봄바람이 일게하네” 김광인 "매화보다 먼저 얼음새꽃" 오늘은 24절기의 둘째로 봄비가 내린다는 우수(雨水)입니다. 아마도 봄비가 내리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풀들이 손짓을 하고, 꽃들이 환한 웃음을 터뜨릴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12월 15일 치 '임금과 신하의 대화'에 우수(雨水)가 나오지요. “임금이 이르기를, ‘언제쯤 얼음이 풀리겠는가?’ 하니, 민영목이 아뢰기를, ‘우수(雨水)가 정월 초순에 있으니, 그때쯤이면 풀릴 듯합니다.’" 옛 사람들은 우수부터 경칩까지를 5일씩 나누어 각각의 특징을 말했습니다. 곧, 첫 5일 동안은 수달이 얼음이 풀린 물위로 오르는 물고기를 잡아 먹이를 마련한다고 생각했고 다음 5일 동안은 추운 지방의 철새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며, 마지막 5일 동안엔 봄기운이 어느새 완연하여 풀과 나무에 싹이 튼다고 하였습니다. 대동강물도 풀린다던 봄을 재촉하는 우수, 여
학교 수업만 끝나면 아이들은 정해진 장소에 모입니다. 그리곤 가지고 온 딱지를 내놓고 딱지치기에 열중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딱지치기는 종이로 만든 딱지를 땅바닥에 놓고 다른 딱지로 그 옆을 쳐서, 땅바닥의 딱지가 뒤집히거나 일정한 선 밖으로 나가면 따먹는 남자 아이들의 놀이였지요. 또 제 딱지가 상대 딱지 밑으로 들어가면 따먹기도 합니다. 이때 제 딱지가 상대 딱지 위에 얹히면 도리어 잃게 됩니다. “야 너 밟았잖아.” “안 밟았어, 임마.” 딱지 한 쪽을 살짝 밟고 치면 쉽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가 계속 따면 잃은 아이는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만일 이 딱지치기에 끼지 못하면 당시로서는 바로 왕따였습니다. 그리고 딱지를 더 많이 따기 위해 딱지를 만드는 종이는 더 두껍고 큰 종이를 쓰려고 하는데 종이가 많지 않았던 그때 다 쓰지도 않은 공책이나 교과서 한쪽을 뜯어내기도 합니다. 또 아버지의 메모지를 쭉 찢어 만들다 어머니께 들켜 혼이 난 적도 있었지요. 딱지는 물론 종이로 직접 접어 만들었지만 나중엔 구멍가게에서
“정조 경신년(1800) 여름, 나는 법천에 갔는데 해좌공이 손을 붙잡으며 기쁘게 맞아주셨다. 그때 집안사람이 벽장의 시렁 안에서 종이 한 묶음을 꺼내 가지고 나가니, 공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찬찬히 살펴보니, 대체로 식량이 떨어진 지 며칠 된 형편이었다. 종이를 팔아 70전을 얻어서 쌀을 사고 말린 고기 한두 마리를 사서 손님들을 대접해주었는데, 그 종이는 비문(碑文)이나 비지(碑誌)를 청하는 자가 폐백으로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태연한 모습이어서 깜짝 놀라 탄복하였다.” 위 글은 다산 정약용이 해좌 정범조에게 채제공의 비문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고 예문관 제학(提學)에 올랐으며, 학문과 문장도 뛰어났지만 청렴하고 단아한 인품 때문에 더욱 추앙을 받았고, 18세기 정조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입니다. 그 정범조는 식량이 떨어진지 며칠이 될 정도로 살림 형편이 어려웠지만, 찾아온 손님에게 내색을 하지 않고 폐백으로 받은 종이 마저 내다 팔아
새해가 되면 우리는 세배를 하고, 떡국을 먹으며, 성묘를 갑니다. 그런데 그런 일 말고도 새해를 맞으면 세화를 선물하고, 그 세화는 안방이나 대문에 붙였습니다. 세화(歲畵)는 새해를 맞아 나쁜 것을 막고 복을 지키기 위해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대문에 많이 붙이기 때문에 문배(門排) 또는 문화(門畵)라고도 합니다. 이 세화를 궁궐에서는 도화서(圖畵署)에서 그려 골고루 나눠주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도화서에서 그리는 세화는 해마다 60장가량이었는데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신하 한 사람당 20장씩을 내렸을 정도로 많은 양을 그렸습니다. 이를 위하여 임시로 고용된 차비대령(差備待令)이 각각 30장을 그릴 정도였습니다. 조선 후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의 세화 설명을 보면 “도화서(圖畵署)에서 장수를 상징하는 수성(壽星)ㆍ선녀(仙女)와 직일신장(直日神將, 그날의 일상사를 도맡아 하는 도교의 당직신 그림)의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였으며 송축(頌祝)의 뜻이 있다.”라고 하였지요. 김매순의 《열양세시기》를 비롯한 많은 세시풍속 책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세화(歲畵)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화는 궁궐뿐만 일반 백성들도 그려 붙였는데 동물 가운데 귀신을
우리의 설로 따진다면 어제 부터가 계사년 새해인 셈입니다. 설날이 되면 우리는 세배를 하고 새해 덕담을 나눕니다만 대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말하지요. 그런데 이 덕담은 명령투여서 바른 표현은 아니며 예전 부터 쓰던 말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덕담을 했는지 알아볼까요? “고모님께서 새해는 숙병(宿病)이 다 쾌차(快差)하셨다 하니 기뻐하옵나이다.” 이 글은 숙종임금이 고모인 숙희공주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숙종은 고모의 오랜 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숙병이 쾌차했다 하니 기쁘다”라며 아직 병중이건만 이미 병이 다 나은 것처럼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정조 때 사람 한경(漢經)은 하진백(河鎭伯) 집안 사람들에게 문안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에 보면 하진백이 과거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을에 있을 과거에서 급제했다며 미리 축하의 덕담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밖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사연구소에 따르면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 비)가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보낸 편지, 인
아주 오랜만에 떠나는 기차여행이었다. 열두 시간을 기차에서 보낸다는 것에 대한 왠지 모를 기대감과, 기차가 태백선 눈꽃길을 통과한다는 광고문구에, 나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래, 창밖으로 쌓인 눈들이 흰 꽃처럼 흩날리는 환상적인 경치를 즐길 수 있으리라, 기차 안에서 책을 읽으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멋진 설경을 내다보는 우아한(?)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침 일찍 기차에 올라 샌드위치를 먹었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박완서 선생님 소설집을 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마냥 좋았다. 내가 탄 칸 앞쪽 반은 60대쯤 되어 보이시는 단체관광객 어르신들, 뒤쪽 반은 둘 혹은 넷 단위로 조용한 여행을 즐기러 온 듯한 관광객 분들이었다. 어르신들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때로는 강렬하게 풍겨오는 음식냄새도, 왁자지껄한 수다도 마냥 괜찮았다. 열차 여섯 량에 나누어 탄 400명이 넘는 관광객들은 저마다 여행의 목적도 방식도 다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첫 정차 역에 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하늘에서 가장 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은 우리 이천만 겨레를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와 승리를 얻은 세계 여러 나라 앞에 우리가 독립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위는 3.1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도쿄 2.8독립선언서의 일부분입니다. 1910년 조선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일강제병합"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9년 뒤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청년들은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한 뒤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와 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지요. 그러나 이들은 가차 없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나라밖으로 파견된 사람을 뺀 실행위원 모두를 포함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체포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조선에 잠입하였고 이후 3.1 독립선언 준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3.1만세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