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야릇한 소리 하나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땀을 줄줄 흘려쌌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헌 일이다 이는 대개 돈푼깨나 있고 똥깨나 뀌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쿵 바로 저 소리다 무대에서는 임진택 명창이 속삭이듯 그의 창작판소리 <소리내력>을 아니리로 시작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감방장의 제안으로 몰래 오락시간이 펼쳐졌는데, 이날 임진택은 4평짜리 감방에서 10여 명의 죄수 청중을 앉혀놓고 김지하의 담시 <소리내력>을 읊었다. 이렇게 북반주도 없이 목소리를 낮추어 흥얼거려 암송한 담시 <소리내력>이 ‘창작판소리’ 12바탕의 첫 계기가 되리라고는 자신도 몰랐다고 술회한다. 어제 7월 13일 저녁 5시,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7.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는 ‘우리시대의 광대’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50돌을 기리는 토크콘서트 <소리의 내력>이 열렸다.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의 이번 공연은 객석이 빈자리가 없었던 것은 물론, 서서 보는 관객들도 제법 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공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송원조 고수(鼓手)의 보비위(補脾胃)정신, 곧 소리꾼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고수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다양한 양념이 들어 있지 않음에도 또 다른 맛의 묘미를 전해주는 경우와 비슷하다는 이야기, 그는 거의 원 박을 반복하다시피 치면서도 강과 약을 분명하게 조절해 주기 때문에 단순, 명료하면서도 다양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송원조를 성공한 고수라고 평가하는 배경이라든가, 또는 송원조 자신이 지금까지도 절실하게 후진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말은 다름 아닌, 소리판의 성공적 비결은 첫째도 둘째도 ‘소리꾼의 기량’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가 주장하는 으뜸 명고수도 소리꾼으로 하여금 그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과 자세가 고법(鼓法)의 기본 정신이 되는 것이다. 서울시 고법의 예능보유자, 송원조의 고법에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함이라든가, 명료함, 또는 겸손함과 같은 덕목들은 바로 송원조 자신의 인격이어서 자신만의 특징을 여지없이 들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분야의 관계 전문가들은 그가 구사하는 단순한 가락들은 강약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전남 목포 목포문화에술화관에서 열린 제36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 명창부에서 노은주 명창이 한농선의 흥보가 가운데 첫째 박 ‘돈과 쌀이 나오는 대목’부터 둘째 박 ‘온갖 비단이 나오는 비단타령’까지 열창하여 심사위원 전원 만점을 받고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았다. 노은주 명창은 시상식 뒤 “더 열심히 소리 공부를 하라고 주신 상이라고 생각하여 대통령상을 받은 소리꾼답게 더욱 정진하겠다. 또한 한농선 스승님의 흥보가로 대통령상을 받았기에 스승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절실하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노은주 명창은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와 춘향가 전수자며, (사)한국민속전통진흥회 부이사장, (사)한국판소리보존회 본부 사무국장, (사)진채선 선양회 이사, 서울시 송파구 무형문화재 위원 등을 맡고 있다. 또 수원대학교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학교wise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으며, 유튜브 ‘노은주판소리채널’ 운영하면서 판소리의 대중화와 보급에 꽃을 피우고 있다.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에는 지난 1993년 제5회 대회부터 격이 가장 높은 대통령상을 주면서 전국의 많은 국악인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송원조 고수(鼓手)는 10대에 <이리국악원>에 들어와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악원의 총무가 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란 점, 그의 기억에 남는 특이한 경험은 당시,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던 김연수 명창이 동초제 판소리를 새로 짤 때, 밤새도록 북을 쳐 주면서 도왔다고 이야기하였다. 한때, 북을 접고, 딴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되돌아왔다고 이야기하였다. 얼마 전,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발표회를 할 때였다. 그는 명고수의 요건으로 첫째가 북을 잡고 앉아 있는 자세가 당당하여 소리꾼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고, 북가락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해야 하며 추임새를 적재적소에 넣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다. “고수의 북가락은 적재적소에 써야 한다. 그럼에도 필요 이상의 많은 가락을 써서 복잡하거나 시끄럽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다.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가락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북가락이 많이 들어가도 좋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최동현은 송원조의 북가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송원조의 북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판소리 12마당의 이름은 조선조 순조(1800-1834년) 때,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戱)》에 보이고 있고,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일제 말(末) 정노식이 쓴 《조선창극사》에도 소개되어 있다는 점,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는 <수궁가>는 순조 때의 명창인 송흥록에서 송광록-송우룡-유성준의 뒤를 이어 정광수, 박초월 등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송우룡-송만갑-박봉래-박봉술로 이어져 온 수궁가와 경기ㆍ충청의 중고제는 전승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 논산 김남수 고법 발표회에서 <수궁가>를 완창해 준 젊은 소리꾼, 박현영 명창에 관해서도 소개하였다. 북을 잘 치고, 못 치는 하는 문제는 별도로 논의한다고 해도, 논산의 김남수가 그의 고향, 논산에서 13번째 고법발표회를 열었다는 열정은 높이 살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발표회 때마다 판소리 명창들을 초대해서 지역의 판소리 음악을 확산해 나가는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김남수는 전라북도 고법 보유였던 주봉신에게 배웠다. 주봉신은 고 박동진의 전속 고수로서 전국을 다니며 박동진과 호흡을 맞추었던 사람이다. 그의 북은 힘이 실려 있는 묵직한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판소리 12마당 가운데 수궁가(水宮歌)는 수궁(水宮)에 잡혀 온 토끼가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궤변(詭辯)과 달변(達辯)으로 용왕의 마음을 움직여 살아 나간다는 이야기다. 마치 호랑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예를 듣고 보는 것 같아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궁가에 나오는 토끼의 말 가운데서 특히 인상에 남는 내용은 강태공이 고기 낚으러 나왔다가 토끼의 선조가 간 씻을 적에, 그 물 조금 떠 마시고 160살을 살았다는 이야기라든가, 토끼 부친이 물놀이하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적에, 동방삭이가 건져주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간을 조금 떼어 주었더니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다는 이야기 등은 전혀 거짓말 같지 않고 솔깃하기만 하다. 토끼의 진술이 이렇듯 구체적이고 자세하니 용왕이 점점 토끼의 말에 빠져들어 가게 된다.토끼가 용왕을 위하는 척, 매달아 놓고 온 간을 용왕이 자신다고 하면 “백발은 검어지고, 빠진 치아 다시 나고, 그래서 지금보다는 더 건강하게 되어, 병 없이 젊음을 누릴 것이라는 이야기” 등은 마치 사실 같아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15년 극장가에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와 최초의 여성 소리꾼 진채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이종필 감독의 <도리화가>가 상영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많은 여성 소리꾼을 만날 수 있지만 그때는 여성 소리꾼이란 상상할 수가 없었지요. 신재효는 어렵게 진채선을 제자로 받아들여 으뜸 명창으로 키웠는데 진채선은 고종 때 경회루 낙성연에서 뛰어난 소리를 보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전라북도 고창군 모양성 앞에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를 기리기 위한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이 세워져 있습니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 곧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했기에 이 여섯 마당은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신재효는 자신의 집을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으며 이 소리청에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많은 소리꾼을 키워냈고, 소리꾼들이 먹고 자는 일, 때로는 그들 가정의 생활비까지도 대주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또 유달리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주었고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은 <완창판소리 - 조주선의 심청가>를 5월 11일(토)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이자, 탁월한 소리와 극적인 발림의 대가 조주선 명창이 강산제 ‘심청가’를 들려준다. 조주선은 예향(藝鄕)으로 불리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국무용과 가야금을 섭렵했고, 중학생 무렵 우연히 판소리를 듣고 매료되어 김흥남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며 소릿길에 입문했다. 성창순 명창 문하에서 오랫동안 ‘춘향가’와 ‘심청가’를, 김수연ㆍ안숙선 명창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김일구 선생님에게 적벽가를 배웠고 여러 명창을 사사하며 꾸준히 공력을 다져왔다. 조 명창은 소리의 각 대목에 담긴 정황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며, 청중이 정서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호소력 짙은 무대를 선보인다고 평가받는다. 1993년 국립국악원 전국국악경연대회 종합대상, 1999년 남원춘향제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일반부 대상,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받으며 꾸준히 실력을 입증했다. 국내 유수의 국악관현악단과의 협연은 물론, 국내를 넘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범피중류(泛彼中流), 등덩둥덩 떠나간다. 망망헌 창해(蒼海)이며 탕탕헌 물결이라. 백빈주 갈매기는 홍요안으로 날아들고, 삼강의 기러기는 한수로 돌아든다. 요량헌 남은 소래, 어적(漁笛)이언마는 곡종인불견에 수봉만 푸르렀다.” (아래 줄임) 어제 4월 21일 낮 2시 서울 삼성동 국가무형유산 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열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심청가' 예능보유자 유영애 명창의 강산제 판소리 완창 공연에서 심청가 가운데 눈대목으로 널리 알려진 ‘범피중류’가 유영애 명창의 구성지며 중하성에 강한 소리로 울려 퍼졌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해설을 맡은 광주시립극장 장명한 수석은 “유영애 명창은 심청가'와 '흥보가' 등 60여 회 넘게 완창 무대를 펼쳐왔다. 오늘로써 완창이 61회 환갑을 맞이한 것이다. 그 엄청난 공적을 유 명창은 만들어 냈다.”라고 감탄했다. ‘완창(完唱)’이란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문학사전》에 “판소리 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부르는 일. 박동진(朴東鎭)이 1968년 9월 30일 서울 남산에 있는 국립국악고등학교 강당에서 다섯 시간 반에 걸쳐 <흥보가(興甫歌)>를 처음부터 끝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판소리, 또는 산조(散調)음악에 쓰이는 장단형 가운데 가장 느린 형태가 <진양 장단>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진양 1장단의 길이를 6박으로 볼 것인지, 6박×4장단으로 해서 24박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진양 장단>의 완성은 동편제(東便制)의 명창, 송흥록이 그의 매부(妹夫)인, 중고제(中古制) 명창, 김성옥으로부터 진양조를 처음 듣고, 그것을 여러 해 갈고 닦아 완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였다, 송흥록은 1780년대 태어나서 180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판소리 동편제의 중시조(始祖)로 알려진 대명창이다. 특히 그가 진양조를 완성했다는 기록은 1940년,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비치고 있는데, 구체적인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맹렬’이라는 여인과 만나게 된 배경과 헤어짐 속에서 이루어졌던 이야기이다. 명창, 송흥록이 대구 감영에 소속되어 있는 명기(名妓)로 노래와 춤이 뛰어나다는 맹렬로부터 ‘미진한 부분이 있다’, ‘더 연습해야 한다(피를 더 쏟아야 한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 곧 수긍하기 어려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