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혼자이신 것 같은데 제 술 한잔 받으시겠습니까?” 굵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두툼한 안경의 한 중년이 내게 소주잔을 내밀고 있었다. 자기도 혼자라 하였고 우중독작(雨中獨酌)을 즐긴다하였다. 말문이 터진 우리는 학창시절로 돌아가 요즘은 술자리에서 자주 회자되지 않는 철학이며 문학, 예술담론으로 시간을 붙들어 놓았다.
긴 얘기 끝에 마침내 서로의 사랑얘기까지 나오게 되어, 나는 슬프게 헤어진 첫사랑 사연을 콧물 훌쩍거리며 그에게 들려주었다. 한참 침묵하며 내 얘기를 듣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기는 십여 년 전에 상처를 하였다 했다. 재혼이었던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평생을 찾아 헤맨 자신의 반쪽임을 알아보고 하나가 되었단다. 취미도 같아 밤늦도록 음악을 듣고 시(詩)를 쓰거나 많은 얘기를 나누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단다.
기적처럼 서로가 닮아있어 어쩌면 둘이는 아마득한 먼 옛날에 별빛도 가물가물한 먼 곳에서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았나 착각할 정도였단다. 두 사람은 그 행복이 영원하리라 확신했고 교외에 텃밭이 딸려있는 아담한 집을 마련하여 손수 푸성귀도 가꾸며 동화 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기분 좋게 반주도 한 잔씩 나누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속에서 ‘여보 팔이 저려요 좀 주물러주세요.’하더란다. 고단했던 그는 아침까지 숙면을 취했고 개운한 기분으로 깨어나 보니 아내 역시 그때까지 자고 있더란다.
“이사람 많이 피곤하구먼.”하며 안았더니 이미 몸이 차갑게 굳어 있더란다. 꿈속에서 들은 줄 알았던 아내의 애원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어떻게 10년을 버텨왔는지 그 자체가 기적이라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서 이불만 들썩여도 아내의 체취로 심장이 사포에 갈리는 것 같았고, 길을 걷다가 아내와 즐겨듣던 음악이 들려오면 그녀와의 기억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더란다. 얼마 전 나미의 ‘슬픈 인연’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놔 보았으나 몇 소절도 채 못 듣고 통곡을 하고 말았단다.
탑골공원으로 향하는 노인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할 때가 돼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문자메시지를 한통 받는다.
“김 형! 김 형과의 만남이 나의 마지막 의미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행복하시길…” 그는 그렇게 나와 슬픈 인연을 맺어놓고 아내 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다시 올 거야
우린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 올 거야
그러나 그 시절의 너를 또 만나서
사랑 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너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