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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대전 향제 줄풍류 태동이야기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54]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기악(器樂)에 관한 이야기로 대전지방의 줄풍류 이야기를 하였다. 가야국이 망하자, 악사 우륵은 가야금을 안고 신라로 투항하여 제자들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각각 가르친 것처럼 악은 악가무를 포함한다는 이야기, 충남 홍성이 낳은 한성준도 춤과 북뿐이 아니라 피리나 소리를 잘해서 곧 악ㆍ가ㆍ무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이야기, 충청지역의 향제줄풍류는 대전, 공주, 예산 등지에서 활발한 편이었으나 1960년대 전후에는 위기를 맞았다는 이야기, 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향제줄풍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대전의 민간풍류를 소개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줄풍류란 방중악(房中樂), 곧 실내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란 뜻이다. 당시 대전 줄풍류 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풍류객은 대금을 연주하는 권영세(1915년 생) 씨로 그는 박흥태에게 가야금 병창, 방호준에게는 가야금 풍류, 김명진에게는 단소 풍류를 배웠다. 또한, 예산의 성낙준에게 대금 풍류, 공주의 윤종선에게 양금풍류, 김태문에게 가야금 풍류 등을 배우고, 한국전쟁 직후에 대전 율회에 들어가 대금을 불었다고 한다. 1965년에 <대전 정악원>에 들어가 회원들에게 실기를 지도하고 실제적인 업무를 맡아보던 줄풍류와 대금, 단소를 즐기던 동호인이었다.

 

권영세 이외의 풍류객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향제줄풍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피리는 안성에서 살다가 대전으로 온 이규성이 불었는데 그는 단소도 잘 불었다고 한다. 안성율방에 있을 때, 이기석에게 단소와, 양금, 해금, 거문고도 배워 잘했다고 전한다. 당시 안성은 풍류객 20여 명이 모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 풍류객은 의사인 김덕규로 그는 공주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는데, 윤기선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윤기선은 권용세의 스승 윤종선의 형 되는 사람인데, 청양의 윤종선은 시조객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가야금의 오필순은 내포향제 풍류와, 피리로 삼현육각, 시나위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초대되었던 전문음악인으로 보이며, 양금의 이수재 역시, 오필순에게 양금과 가야금을 배웠다. 해금의 김창규 (김창희)는 해금 산조를 연주한 것으로 보아, 경기도에서 초빙된 전문음악인으로 보인다.

 

단소의 이경오와 장고 주자 조동호 역시 초빙된 전문음악인 듯하다.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을 풍류객이라고 하고 풍류를 즐기는 방을 풍류방이라고 한다. 풍류에는 줄풍류와 대풍류가 있다. 또한, 충청도에 전승되는 풍류를 내포풍류라 하는데, 충청도에는 대전, 공주, 예산 등지에 풍류가 있었지만, 지금은 율회를 갖고 있지 않다

 

대전에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대전 율계가 있었고, 1965년에는 대전정악원이 있었고, 1970년에는 율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50년대부터 대전에서 율회에 참가했던 사람으로는 권영세, 심남섭, 이태걸, 이규성,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전 연정국악원장을 지낸 임윤수는 대전풍류뿐 아니라, 젊어서 경상북도 풍류를 배웠기에 율객이나 율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글쓴이가 서울음대 1학년 시절이었던 1964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연정 임윤수 선생이 나에게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대전에서 힘들게 국악발표회를 하게 되었으니 대금 연주자 1인과 함께 대전에 와서 민간풍류, 가곡반주, 시조반주 등을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그는 충남 대전에서 신문기자로 있으면서 충남 국악의 재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수시로 서울 행사를 관람하면서 젊은 국악인들과 두루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연정의 요청에 나는 동기생 대금 연주자인 박종대(현재 미국 거주)와 함께 대전 연주회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대전 현지의 풍류객으로는 연정 임윤수 씨가 거문고 연주와 시조창을 불렀고, 풍류는 영산회상 중에서 하현도드리와 염불도드리 타령까지 이어서 연주했다. 나는 피리, 박종대는 대금, 해금은 김영균, 그리고 가야금과 양금은 대전의 풍류객 4~5명이 참여했던 것으로 회상되는데, 기억에 남는 분은 나이가 지긋했던 권영세뿐이다.

 

권영세 씨는 국악 전반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분으로 대금을 잘 불었다고 하나, 당시엔 가야금과 양금 연주를 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대전의 풍류를 찾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역설하던 분으로 기억에 남고 나머지 분들은 누구인지? 무슨 악기를 연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발표회의 사회는 남자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대전 출신이었고, 공연장소는 역 앞 대흥동 제일극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외지의 국악인들이나 단체가 대전을 지나면서 국악공연을 한 예는 있겠으나, 대전의 국악인들이 중심되어 민간풍류를 연주한 것은 공식적으로 그때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여하튼 첫 순서로 민간풍류를 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벌써 55년 전의 일로 1964년도 대전에서 열린 첫 국악발표회의 기억이 아련하다. 당시 완행열차로 가고 오고 했는데, 아마도 5~6시간 이상 소요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약 20여 년이 지나 대전은 대전시립연정국악원이 문을 열면서 국악의 불모지라는 불명예를 씻어 버리게 되었다. 시민들의 참여와 함께 연정의 공이 컸던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