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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이 통제사의 죽음을 애도함

서애 류성룡 선생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쓴 시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4]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통제사의 죽음을 애도함

 

혼자 힘으로 하늘의 절반을 받들어 지탱했지.

고래 같은 흉악한 도적 격살하여 거친 물결 피로 물들였고.

맹렬한 불길로 풍이(馮夷) 같은 왜적 소굴 다 태웠네.

공이 높아지니 시기와 모함의 덫 피하지 못하면서도,

(나라 위해) 목숨을 깃털처럼 여겼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그대는 못 봤는가 현산 동쪽의 한 조각 비석에

양공(羊公)이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처량하구나 몇칸의 민충사(愍忠祠)

해마다 비바람에 훼손돼도 수리조차 못 하는데,

지네 나오는 사당에 소리 삼키며 우는 곡소리 들리도다

 

 

哀 李統制使

 

       閑山島古今島 (한산도고금도)

       大海之中數點碧 (대해지중수점벽)

       當時百戰李將軍 (당시백전이장군)

       隻手親扶天半壁 (척수친부천반벽)

       鯨鯢戮盡血殷波 (경예륙진혈은파)

       烈火燒竭馮夷窟 (열화소갈풍이굴)

       功高不免讒妬構 (공고불면참투구)

       性命鴻毛安足惜 (성명홍모안족석)

       君不見峴山東頭一片石 (군불견 현산동두일편석)

       羊公去後人垂泣 (양공거후인수읍)

       淒凉數間愍忠祠 (처량수간민충사)

 

       風雨年年OOO

       OOOO毁不修 (풍우년년훼불수)

 

       時有蜒戶呑聲哭 (시유연호탄성곡)

 

 

 

 

 

 

 

 

 

 

 

 

 

 

 

 

 

 

 

 

 

 

 

서애 류성룡 선생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쓴 시입니다. 통제사의 죽음에 조선의 대신 가운데 서애가 느끼는 슬픔은 그 어느 대신보다 더욱 북받쳤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3살 아래의 이순신을 잘 알았고, 또 자신의 강력한 천거로 전쟁 1년 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위기를 막아냈으니, 그런 이통제사의 애통한 죽음에 애도시를 안 쓸 수가 없었겠지요.

 

 

《난중일기》에 보면 서애가 보낸 병법서를 받아들고 이장군이 감격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애가 읽어보고 이장군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 생각하고 먼길 인편으로 보내온 거지요.

 

시에서 서애는 이장군이 혼자 힘으로 하늘의 절반을 받들어 지탱했다고 합니다.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만약 임진왜란 때 이 장군이 호남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의 수군을 격파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랬다면 육지에서 밀고 올라오는 일본 육군과 서해를 타고 올라오는 일본 수군의 합동 공세로 조선은 견디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평양성을 점령한 일본 육군이 수군을 기다린다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왜군은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와 조선을 완전정복 하였을 것입니다. 서애도 《징비록》에서 왜군이 평양성에서 잠시 지체한 것에 대해 이는 참으로 하늘이 도운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고 하고 있지요.

 

 

시에서 서애는 풍이굴(馮夷窟)을 맹렬한 불길로 태웠다고 합니다. 풍이(馮夷)는 물의 신 하백(河伯)의 본명이라고 하는데, 이름에 오랑캐 ‘夷’자가 들어갔으니, 중화 입장에서는 오랑캐였네요. 서애는 왜놈들을 많은 오랑캐 가운데 풍이에 비유했습니다. 현산(峴山)은 중국 호북성 양양현 남쪽에 있는 산입니다. 양공(羊公)은 중국 삼국시대 서진 사람인 양호(羊祜)를 말한다고 하는데, 양호는 항상 추윤보(鄒潤甫)와 함께 현산에 올랐다고 하는군요.

 

양호는 양양을 지키면서 민심을 얻었다고 하는데, 양호가 죽자 후세 사람이 현산에 그를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를 볼 때마다 어진 양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서애는 이 통제사를 양공에 빗대어 사람들이 이 통제사를 추모하는 비를 보고 눈물을 흘릴 것을 생각하고 시를 썼군요.

 

하여튼 우리나라 한시에는 중국의 인물이나 고사를 인용하는 것이 많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만 인용하여도 사람들이 다 공감하면서 시를 감상하였겠지만, 오늘날 이를 잘 모르는 후손들은 그런 고사를 따로 알지 못하면 한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에서 ‘000’라고 한 부분은 본문에서 지워져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시를 쓴 책자가 오래되다 보니 하필이면 그 부분이 지워져서 잘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대충 뜻은 통하네요. 민충사는 이 통제사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징비록》에 보면 장군이 죽었을 때 명나라 진린 제독은 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통곡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명나라 장수 형개는 당연히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충혼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명나라 장군이 그런 제안을 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조정에서는 장군을 위해 사당을 지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공고불면참투구(功高不免讒妬構)’라는 구절에서 이를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군의 공이 높아질수록 이를 헐뜯고 시기, 질투하는 소인배들로 가득찬 조정... 정말 분노로 손이 떨릴 지경입니다. 그러자 장군을 존경하는 바닷가 백성들이 나서서 사당을 짓고 이름을 민충사(愍忠祠)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나서서 장군을 위해 사당을 지었다면, 그 사후관리라도 조정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민충사는 연년세세(年年歲歲) 풍우에 시달려 훼손되어도 수리도 제대로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당에서 지네가 나올 정도이고... 이게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장군에 대한 대접인가요? 이 시를 음미하다 보니 아무래도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죽기로 작정하셨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러니 치열한 해상전투에서 갑옷도 제대로 안 입고 함대 맨 앞으로 나와서 전투 지휘를 하다가 전사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쟁이 끝났을 때 선조는 입으로는 장군보고 일등공신이라고 하겠지만, 모든 백성이 존경하는 장군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트집을 잡고 없애려고 하였을 것 같습니다. 이를 예감한 장군도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느니 차라리 적의 총탄에 죽자고 생각하였을 것 같고요.

 

​시의 마지막 구절은 탄성곡(呑聲哭)입니다.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민충사를 찾아온 이들도 이런 분위기에 소리 내어 곡을 하지 못하고 소리를 안으로 삼키며 곡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미 서애 자신이 그렇게 소리를 삼키며 곡을 하였기에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탄성곡으로 마무리한 것이구요. 시를 다시 천천히 음미해봅니다. 시에서 다시금 장군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서애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서애를 따라 저도 소리 죽여 장군을 위해 곡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