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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조선후기 중인들의 문학단체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4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野闊秋多月(야활추다월)  들은 넓어 가을 달빛 그득하고

江淸夜少煙(강청야소연)  강은 맑으니 밤의 연기는 있는 듯 마는 듯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던 왕태(王太, 1764~?)의 시입니다. 왕태는 집안이 가난하여 술집 심부름꾼으로 힘들게 일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아 점차 시재(詩才)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대표적인 시사였던 송석원시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송석원시사는 천수경(1758~1818)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중인들 문학단체입니다.

 

그동안 시사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중인들이 시사를 결성하였다는 것은 이 당시 중인들이 시사를 결성할 만큼 문학적 소양이 있었고, 경제적 능력도 되었다는 얘기지요. 18세기 말에는 조선도 점차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중인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 문학 활동에 대한 욕구가 이런 시사까지 만들게 된 거지요. 이 당시 이러한 중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 활동을 위항문학(委巷文學) 또는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 합니다.

 

 

‘송석원’이라고 하면 소나무와 돌이 어울리는 원림(園林)이라고 할 텐데, 송석원시사를 결성한 천수경 집이 바로 인왕산 자락으로 집 바로 옆이 소나무와 돌이 어울리는 멋진 원림이어서, 천수경이 이곳을 송석원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왕태, 장혼, 조수삼 등의 중인 문인들은 송석원에 모여 시를 짓고 풍월을 읊으며 즐겼으며, 양반들도 송석원시사에 초대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답니다. 송석원시사에서는 백전(白戰)이라고 하여 남북 두 패로 나누어 시작(詩作)을 겨루는 전국적 규모의 시회도 1년에 두 차례씩 열었다고 합니다.

 

이런 유명한 시사이니, 이들의 시회 모임이 그림으로도 남아있습니다. 1791년 유둣날에도 이들은 모여서 시를 지었는데, 시사 동인인 김의현이 당대의 유명한 화원 이인문과 김홍도를 찾아가 이를 그림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물론 상당한 작품비도 주었겠지요.

 

그리하여 이인문이 1791년 유둣날 낮에 연 시회를 그린 것이 ‘송석원시사아회도(松石園詩社雅會圖)’고, 김홍도가 이날 밤의 모임을 그린 것이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입니다. 그리하여 김의현이 이날 발표된 시와 이 그림들을 모아 문집으로 만든 것이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입니다. 송석원시사를 일명 옥계시사라고 하였으니, 옥계청유첩이라고 하였네요.

 

 

그림뿐입니까?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있습니다. 천수경은 죽기 1년 전 추사에게 ‘松石園’ 글씨를 부탁합니다. 추사도 천수경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추사의 글씨도 송석원의 바위 위에 영원히 새겨졌습니다. 옆의 사진 속의 글씨가 바로 추사의 글씨인데, 1950년대 말 김영상씨가 촬영한 것입니다. 그럼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송석원은 어디일까요? 옥인동에 가면 화가 박노수의 집을 개조하여 만든 박노수 미술관이 있지요? 사람들은 그 언저리가 송석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추사의 글씨를 보니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 확인해보고 싶으시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이 글씨를 볼 수 없습니다. 그 후 이 일대가 개발되고 많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는 땅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마 어느 사람의 집에서 이를 깔아뭉개고 있겠지요. 먹고 살기 바쁘던 때, ‘예술이 무슨 밥 먹여주냐?’ 하던 우리를 보면 당시 선조들은 뭐라고 할까요? 지금은 그곳의 어느 골목에 ‘송석원 터’라는 작은 표석만이 이곳이 한때 여항문학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추사 글씨는 볼 수 없지만, 옥인동에 가면 보물찾기하듯이 ‘송석원 터’ 표석이라도 한 번 찾아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