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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ㆍ억울ㆍ짜증을 드러낸 조선시대 편지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1월 22일 ‘머니투데이’에는 “경매 올라온 '연애편지' 42통, 9억에 낙찰…누가 썼길래?”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CNN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유명 가수이자 작곡가, 시인인 밥 딜런이 고등학생 때 썼던 연애편지가 경매에서 66만 9,875달러(약 9억 원)에 낙찰됐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도 고등학생 시절 연애편지를 썼던 추억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그런 연애편지가 있을 까닭이 없다. 다만, 부부 사이에 절절한 사랑을 주고받은 흔적인 편지가 지금 우리에게는 유물로 남아있다.

 

199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에서는 이장하는 무덤에서 죽은 남편을 향해 애끓는 사랑과 비통함을 토하는 편지가 나왔다. 죽은 사람은 1586년 31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은 이응태였는데 이응태의 아내 원이엄마가 쓴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하얘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라는 편지가 나와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며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유물이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 그런 원이엄마가 쓴 애정편지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경목이 쓰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펴낸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이라는 책을 보면 전라도 지방 부안김씨 우반종가에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500여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주고받은 수백여 편의 편지가 남아있어 조선 후기 지방 양반의 생활상과 일상 감정을 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들 편지인 간찰을 읽으며 가장 자주 마주했던 주요 감정으로 욕망ㆍ슬픔ㆍ억울ㆍ짜증ㆍ공포ㆍ불안ㆍ뻔뻔함 등 일곱 가지를 꼽는다. 일곱 가지 감정 열쇠말을 중심으로 살펴본 옛사람들의 내면은 뜻밖에 솔직하고 비통하며 때로는 집요하기도 하다. 여과 없이 분출되는 감정들이 삶의 현실과 버무려지며 생생한 일상을 눈앞에 풀어 놓는다.

 

이 책에서는 축첩(畜妾)의 명분과 욕망의 변화, 가족을 잃은 슬픔 감추기와 드러내기, 청탁 처리로 점철된 수령의 일상과 은폐된 짜증, 출신에 따른 차등과 편견, 드러내서는 안 되는 약자의 억울함과 사회관계망 유지를 위한 감정 통제, 아무도 피할 수 없었던 기근과 돌림병, 일상에 깊게 드리워진 굶주림의 공포, 서울 정가의 민감한 소식과 불안에 뿌리를 둔 유언비어, 비밀의 흔적을 지워야만 하는 불안함, 유배당한 관리들의 고달픈 생활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뻔뻔함 그리고 그들을 돕는 후원자의 속마음 등을 세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먼저 축첩의 명분을 쌓고 중매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자

 

“드릴 말씀은 저희 큰아이가 혼인한 지 4년이 되었는데 아직 태기(胎氣)가 없습니다. 또 며느리가 심한 배앓이를 해서 귀여운 손자를 얻을 것이라는 온 집안의 희망이 이제는 끊겼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안의 피를 이은 여자를 구한 지 오래되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소문으로 듣건데 김안주(金安州)에게 서녀(庶女)가 있다고 하던데 만일 그녀를 얻어서 아들을 낳게 된다면 반드시 절의(節義) 높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감께서 좋은 말로 한번 주선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만일 이 일이 절박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염감께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이는 1640년(인조 18)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원두표가 아들의 첩을 구하려고 김홍원이란 사람에게 중매를 부탁하며 보낸 편지다. 이 편지는 원두표가 온갖 예의를 갖추고 정성을 들여 쓴 것으로 편지지 오른쪽 아래에는 두어 송이 매화가 그려 있고, 윗부분에는 죽간(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글자를 적던 대나무 조각) 무늬가 청색으로 인쇄되어있어 당시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고급 편지지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했지만, 정실부인 외에 첩을 둘 수 있었다. 조선시대 부유하고 권력을 가졌던 자들 대부분은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첩을 두었는데 그 명분 가운데 하나가 아들을 낳아 집안의 혈통을 잇는다는 것이었다. 여기 원두표도 그런 명분으로 아들의 첩을 구하려고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보다 더 절절한 것들도 있다. “수령으로 부임해 객지 생활을 한 석 달 동안 연달아 형과 누이의 상을 당하니 참혹함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한평생에 오늘은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편지들은 읽는 독자에게도 가슴 아픈 심정을 지니게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보는 조선시대 편지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편지 앞부분에 깍듯한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리가 답장을 가지고 와서 근래에 영감의 생활이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그리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제가 1년 만에 노친을 뵙게 되니 그 기쁨이 어떠했을지 영감님께서는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병중에 그리움이 평소보다 배가 되었는데 뜻밖에 인편이 찾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긴 여정 중에 잘 지내시는 걸 알았으니, 절절히 기쁘고 위안이 되어 저의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시대 사람들과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지녔음은 물론 편지에서 그것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뚝딱하면 번개글(이메일)로 편지를 보낼 수도 있어서 예전 조선시대 손으로 직접 쓴 편지만큼 절절함이 묻어오는 편지를 만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도 이 책 《옛 편지로 읽는 조선 사람의 감정》을 읽고 옛사람들의 감정을 가슴에 보듬어보며 메마른 마음을 쓰다듬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