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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이 붙으면 누군가의 아들은...

무심거사의 중편소설 <열번 찍어도> 15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세 번째 만남

 

박 교수의 예상을 깨고 미스 최가 《아리랑》 제1권을 읽었기 때문에 약속대로 박 교수가 점심을 사게 되었다.

 

“아니, 김 교수의 실력이 그 정도인 걸 몰랐는데.”

“뭐 말입니까?”

“아가씨 홀리는 재주 말이요. 어떻게 꼬셨으면 미스 최가 《아리랑》을 다 읽어요?”

“미스 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문예반에 들어갔다네요. 방통대의 국문과에 1년 다니다가 중퇴했다나 봐요.”

“그래도 그렇지요. 아마 미스 최가 김 교수에게 마음이 있는가 봐요. 김 교수, 조심해야겠어요.”

“예, 조심해야지요. 그러나 자신이 없네요.”

“그럼 뜨겁게 연애를 한번 해봐요. 우리 나이에는 젊은 아가씨하고 연애하면 젊어진다고 합디다. 소녀경(素女經)에도 있지 않소. 젊은 여자와 관계하면 젊은 기를 빨아들여 젊어진다고.”

“대학교수가 돈은 없고. 우리는 한 달에 한 번만 만나기로 했어요. 매달 《아리랑》 한 권을 읽은 뒤에 연락하기로 했지요. 아리랑이 모두 12권이니까 최소 일 년은 만날 수 있겠네요. 아리랑이 끝나면 《태백산맥》으로 넘어가야지요.”

“《태백산맥》은 몇 권짜리요?”

“열 권이지요.”

“꿈도 야무지시네.”

“인생이란 꿈을 먹고 사는 것 아닌가요?”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계속해서 돌았다. 세월은 쉬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동안 김 교수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녔다. 명목상으로는 자식을 위하는 마음으로 다니지만, 매일 아침 새벽 4시 반에 일어나기가 현대 생활에서 어디 쉬운가? 지금까지 아비 노릇을 제대로 못 해서 아들 성적이 그 모양이라는 아내의 힐난에 김 교수는 코가 꿰었다. 김 교수는 매일 새벽잠을 뿌리치고 소가 끌려가듯이 새벽 기도에 갔다.

 

그런데 100일 기도라는 것이 아주 맹랑하다.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는 김 교수의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교회에서도 한다. 심지어는 이웃 절에서도 입시생을 위한 100일 기도를 한다고 한다. 모든 고3 학생의 학부형이 입시생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기도를 듣는 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처한 처지에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고3 수험생이 70만이고 대학과 전문대의 전체 정원이 50만이므로 최소 20만 명은 입시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면 기도를 듣는 ‘그분’ 입장에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고 누구의 기도는 외면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학부형 대부분이 세칭 일류대학을 목표로 기도하지 ‘우리 아들 어디라도 좋으니, 대학에만 합격시켜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하지 않다는 점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김 교수는 차마 ‘우리 아들을 꼭 일류대학에 붙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꼭 붙으면 누군가의 아들은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기껏 나오는 기도는 ‘우리 아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미지근한 기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기도한다면 설혹 우리 아들이 입시에 실패하여도 그것은 기도를 듣는 분의 책임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아들의 잘못이 될 것이다.

 

기독교계에서 한때 <수능 기도회, 이렇게 바꾸자>라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2%가 “수능 기도회, 문제 있다”라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성서학자 김회권 교수는 《입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라는 책에서 한국 교육의 입시 위주 무한 경쟁주의 현실을 기독교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의 풍경 (요한 5:2~9)”에 비유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뒤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김회권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이는 순간 제일 먼저 들어간 자만 병이 낫는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1등을 기다리는 38년 된 병자의 모습은 1등을 해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1등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고 발굴하여 섬김과 사랑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김회권 교수는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맞고 김 교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을 수능일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아내에게 말할 수는 없다. 이론과 현실은 언제나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