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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

[디제이 김상아의 음악편지 21] 작사가 반야월의 가슴 아픈 노래

[한국문화신문 =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지난해 이맘때쯤 북한의 한 실세 정치인이 실각을 하였다하여 언론매체가 연일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혹시 전쟁이 나지는 않을까 하며 걱정하는 이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6·25라는 골육상쟁의 참극을 겪은 우리로선 괜한 걱정이라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그저 이 땅에서 그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늘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들으며 6·25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되짚어 보기로 한다. 

작사가 반야월(가수 진방남)은 동란이 일어날 즈음 미아리에 살았다. 전쟁 하루 전까지도 전쟁이 나리라곤 상상도 못한 채 콩쿠르 준비에 골몰하다가 새벽녘에 들려오는 포성소리를 듣고서야 전쟁이 난 줄 알았다. 

자유당정부는 북괴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며 거짓으로 국민들의 동요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전쟁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적 치하에서의 생활이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붉은 완장 찬 사람들이 가가호호 뒤지고 다녔고 밤마다 인민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예술인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살기위해서 각 공산단체에 자발적으로 가입을 해야 했다. 반야월도 가극동맹이라는 예술단체에 가입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위험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아내와 상의 끝에 서울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뒤에 오기로 약속하고 야음을 틈타 자신은 처가가 있는 경북 김천까지 걸어서갔다. 

천우신조로 처가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뒤따라오기로 한 아내와 아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처자식을 두고 먼저 왔다는 죄책감과 처가식구들을 볼 면목이 없어 괴롭게 지내던 차에 9·28 수복 소식이 전해졌다. 한 걸음에 달려간 그는 식솔들을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다 눈물을 훔치고 보니 둘째 딸이 보이지 않았다.  

   
▲ 이해연 ‘단장의 미아리고개’ 수록 음반 표지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
한 많은 미아리고개

 그 연유를 아내에게 물어보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며칠 전 유엔군의 포격이 심해지기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 같아 김천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미아리고개를 넘을 때 허기에 탈진한 둘째 딸이 화약연기를 맡고나서는 그만 깨어나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마땅한 연장이 없어 손으로 흙을 파고 대충 묻어주고 왔다는 더 기막힌 이야기까지 눈물을 흘리며 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추스르고 딸아이가 묻혀 있다는 곳을 아내와 함께 찾아갔으나 짐승이 물고 갔는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 

훗날 반야월은 그때 그 아픈 사연을 토대로 <단장의 미아리고개> 가사를 지었다. 

이 노래는 이해연의 목소리에 실려 1956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녀는 밴드 마스터 베니 김(김영순)의 아내이자 연안부두를 히트시킨 김 트리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