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는 조선시대 수도와 가까운 근기(近畿)로서 왕실과 관련된 능과 묘가 많다. 예종의 원비 공릉과 성종의 원비 순릉, 영조의 맏아들 진종의 영릉, 이 세 능이 파주삼릉이고 영조의 친모 숙빈 최 씨의 소령원, 영조의 후궁이며 진종의 친모 정빈 이 씨의 수길원 등 두 원이 있다. 그밖에 대군과 군. 부마와 공주의 묘도 무수히 많다. 이 글에서는 공주와 옹주 묘를 중심으로 파주에 잠들어있는 조선왕실의 공주와 옹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참고로 공주와 옹주는 모두 왕의 딸이지만 공주는 왕비의 소생이고 옹주는 후궁이 난 딸이다. 경선공주(慶善公主)는 태조의 둘째딸이다.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이며, 남편은 좌의정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인 심종(沈淙)이다. 심종은 청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간을 도와 난을 성공시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올랐다. 통일로 문산읍 사목리 군부대 훈련장 안에 공주와 남편 심종의 봉분이 나란히 있고 그 앞에 상석이 역시 둘 놓여 있다. 무덤 위 정면으로 군부대가 바라보이는데 장병들이 공주님을 잘 지켜주고 있어 유
지난해 12월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파주 이이(李珥)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조선 중기 유학자인 율곡 이이(1536~84)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51)과 관련된 지역을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은 강릉의 오죽헌(보물 제165호)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곳은 율곡의 어머니 친정, 곧 외가로 태어난 곳이고 율곡의 본향(本鄕)은 파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율곡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다 열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곳 자운산 아래 묘를 쓰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파평면 율곡리는 임진강가 화석정이라는 정자 아래에 있는 마을로 이름처럼 밤나무가 무척 많은 마을이다. 이곳엔 율곡의 선조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율곡의 후손이 아직도 살고 있다. 율곡이라는 이이 선생의 호도 이곳의 지명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율곡은 관직에서 물러나와 쉬고 있을 때면 이곳 율곡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화석정에 올라 책도 읽고 시도 지었다. 율곡과 관련된 또 다른 대표적 유적지는
파주시 문산읍에서 37번 도로를 타고 적성 방면으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율곡 이이의 선조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율곡리와 율곡선생이 8세에 지은 한시(漢詩) 현판이 걸려있는 화석정을 지나게 된다. 그 앞 임진강가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몽진을 가면서 건너갔다는 임진나루가 있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오른 쪽으로 파평윤씨의 시조 탄생설화가 깃든 용연이 있으며 좀 더 들어가면 율곡이이 선생과 우계 성혼선생의 파산학파 산실인 파산서원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37번 도로는 임진강을 끼고 달리기 때문에 늘 시야가 시원하고 눈맛이 좋다. 파평면으로 들어서서 리비교 사거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장마루 먹거리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장파리로 영화 ‘장마루촌의 이발사’의 주무대였다. 리비교는 6.25전쟁 당시 북한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미군 2사단 공병대대 리비중사가 다리의 북단 일부를 폭파
조리읍 삼릉로 89번지에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시대 능 40기 가운데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세 기(基)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학교 소풍으로 한두 번쯤은 꼭 다녀갔던 이 삼릉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능인 공릉과 9대 성종(成宗)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인 순릉, 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과 그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의 능인 영릉을 말합니다. 공릉의 장순왕후는 세조를 도와 권력을 잡은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의 셋째 딸로 1460년(세조6)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성대군(人城大君)을 낳고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산후병으로 죽었습니다. 왕세손이 태어났다고 왕실에서는 기뻐하며 죄인들의 죄를 사면하는 등 축하행사를 했지만 세자빈이
파주의 문화재 연재 ① 고려와 조선시대 천 년 이상 도읍지에서 가까운 곳이었던 파주지역은 오랜 역사와 얽혀있는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습니다. 국가지정문화재와 경기도지정문화재, 파주시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와 전통사찰 등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파주의 역사와 이야기를 안고 무수한 세월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지요. 이번 호부터 파주의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우선 국가지정문화재의 보물 두 가지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 보물 제93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은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석불로 고려시대에 천연바위벽을 이용해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쌍미륵 석불입상입니다.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을 쓴 방립불은 여상(女像), 이렇게 두 석불이 마치 부부처럼 자애로운 얼굴로 미소를 띠고 있지요. 이 쌍미륵 석불에는 예로부
‘분암(墳庵)’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분암은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 수없이 나타나며 지금도 사찰의 형태로 간혹 남아있다. ‘분암’의 ‘墳’은 무덤, ‘庵’은 암자를 말하니 ‘무덤가에 있는 암자’를 말한다. 다시 풀어보자면 ‘선영의 묘역 주위에 건립되어 묘소를 지키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려주는 불교적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시설이므로 당연히 스님이 머물러 있고, 주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분암은 재궁(齋宮), 재암(齎庵), 능암(陵庵), 재사(齋舍) 등으로도 불렸는데 왕실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까지도 왕릉과 관련한 원당(願堂)과 원찰(願刹)을 세우고 불교적 제의가 성행하였으며, 이를 따라서 사대부나 관료들의 집안과 문중에서도 분암(墳庵)을 세우거나 불교식 상장례를 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분암은 죽은 이를 화장하고 난 유골을 모셔두고 명복을 빌며 승려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던 시설이었으나 한때는 유생들의 시회 또는 강학장소, 또는 문집이나 족보를 편찬하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경기도 파주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