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삼현육각>이란 말에서 <삼현>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였다. 삼현이란 말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여러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해석이 분분하다는 점을 전제하면서《삼국사기》 통일신라 조에 소개되어 있는 삼현(三絃)은 3종의 현악기, 즉 거문고, 가야금, 비파를 가리키는 말이어서 삼현육각의 삼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점, 조선조 영조때에는“근래에 삼현이 너무 촉급해 졌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의 음악 일반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보인다는 점을 말했다. 또한 “삼현이라고 하는 것은 군악을 가리키는 것이다.”라는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내용처럼 행악(行樂)에 쓰이는 음악일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였다는 점, 행악은 힘차고 씩씩한 곡풍이어서 전부(前部)고취와 후부고취로 구분되는데, 전부고취는 태평소와 나발, 나각 등이 중심이고, 후부(後部)고취는 피리, 대금, 해금과 같은 선율악기들의 세악수(細樂手)편성이었다는 점도 얘기했다, 더불어 삼현의 의미와 가장 가깝게 연상되는 악곡은 <관악영산회상>, 일명 <삼현영산회상>으로 보인다는 점, 또한 가면무나 놀이형식의 탈춤 등을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간 기악합주의 주류를 이루어 온 삼현육각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서울 경기지방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음악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피리의 최경만, 대금의 이철주, 해금의 김무경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는 이야기, 삼현육각의 악기편성은 피리 2인, 대금 1인, 해금 1인, 북 1인, 장고 1인 등, 6인이며, 최경만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악장으로 재임하던 2006년 11월, 50여년 만에 대풍류 전곡을 재구성하여 발표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령산과 같은 음악은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 때문에 호흡이 길어야 하며 피리와 대금, 해금의 가락이 어렵고 장단이 불규칙한 악곡이라는 이야기, 전승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의욕적으로 공연을 준비한 삼현육각보존회의 열의와 뒤늦은 결정이긴 해도 서울시의 시 지정 문화재로 삼현육각을 선정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서울경기의 대풍류 원가락을 되찾는 작업에 고심해 온 보존회장 최경만은 어렵고 재현이 불가능했던 부분은 지영희 편 《민속음악연구집》을 참고하였고, 선배나 선생들이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간 기악합주의 주류를 이루어 온 삼현육각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서울 경기지방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음악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피리의 최경만, 대금의 이철주, 해금의 김무경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는 이야기, 삼현육각의 악기편성은 피리 2인, 대금 1인, 해금 1인, 북 1인, 장고 1인 등, 6인이며, 최경만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악장으로 재임하던 2006년 11월, 50여년 만에 대풍류 전곡을 재구성하여 발표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령산과 같은 음악은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 때문에 호흡이 길어야 하며 피리와 대금, 해금의 가락이 어렵고 장단이 불규칙한 악곡이라는 이야기, 전승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의욕적으로 공연을 준비한 삼현육각보존회의 열의와 뒤늦은 결정이긴 해도 서울시의 시 지정 문화재로 삼현육각을 선정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서울경기의 대풍류 원가락을 되찾는 작업에 고심해 온 보존회장 최경만은 어렵고 재현이 불가능했던 부분은 지영희 편 《민속음악연구집》을 참고하였고, 선배나 선생들이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충남 서천이 낳은 판소리 이동백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근대 판소리사에서 큰 이름을 떨친 이동백(李東伯,1867-1950)은 충청남도 서천 태생이다. 84세로 작고하기 전까지 평생을 소리꾼으로, 창극운동과 후진 양성 등 판소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란 점, 일제 강점기,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가 위축될 시기에 김창환,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등과 함께, 판소리를 지켜가며 창극운동에 공이 큰 5명창 중에 한 사람임을 얘기했다. 또 그의 성음은 매우 미려하면서도 다양해서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일을 자유자재로 했으며 특히 하청(下淸)이 웅장했다는 점, 그는 심청가와 적벽가에 능했고 새타령은 이날치 명창 이후 당대 독보였다는 점, 그의 판소리제는 충청지역의 중고제로 분류된다는 점, 최근에 미국 빅터 음반사에서 녹음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동백 명창의 100년 전 음반, 춘향가 SP(유성기 음반) 희귀본 2장이 발견되었다는 점, 이동백을 기리는 전국판소리 경연대회가 충남 서천에서 열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부터는 엊그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던 삼현육각(三絃六角)이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의 세력가들이 다나베를 위한 만찬장에서 가곡을 들려준 것과 관련하여 가곡이 어떤 특징을 지닌 음악인가 하는 점을 간단하게 언급하였고, 궁중음악과 춤을 촬영하는 현장 이야기를 하였다. 가곡은 형식이나 선율, 시김새나 창법, 또는 발음법 등이 특징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재미있는 노래가 아니어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는 어려운 노래라는 이야기, 그러나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을 하나로 묶는 힘을 지닌 노래라는 이야기, 그리고 다음날 궁중음악과 춤을 촬영할 때, 이를 신기하게 여긴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담장 일부가 허물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명월관에서는 궁중 연례악과 춘앵전 등 궁중무용을 찍었고, 촬영이 끝나고 명월관 특별 연회장에는 이동백(李東伯)이 나와 판소리를 들려주었는데, 그는 조선 제일의 명우인 만큼 성량이나 음색이나 모두 탄복할 정도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명월관 별실에서 가진 연회에 조선 명창 이동백이 어떤 소리를 들려주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러나 조선 제일의 명우답게 성량이나 음색이 모두 탄복할 정도라는 점에서 이동백의 위용이 대략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근대 판소리사에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당대의 거물 정치인들이 삼청동 송병준의 별채에서 다나베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으며 주 종목은 가곡과 궁중무용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자로 송병준, 이완용, 박영효 등이 거명되는데, 송병준은 일진회를 이끌며 고종의 퇴위와 한일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이완용은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하는 등, 민족을 배반하는 일을 자행한 인물이며 박영효도 일제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친일파들이었다. 또한 그 자리에서 연주된 음악은 가곡과 궁중의 무용이었는데, 가곡을 선정한 배경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노래로 조선조의 지식인들이 즐기던 점잖은 노래였기에 일본인에게 음악적 수준을 과시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이며, 가곡의 특징으로 형식이 세련되고 정제되어 있다는 점, 16박과 10박형 장단 그 어느 것도 일체의 즉흥성이나 변형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 춘앵전(문화재청) 이처럼 가곡의 형식이나 장단은 매우 엄격한 편이다. 가곡은 5장 형식인데 이것은 시조시의 3형식을 확대한 것이다. 가곡은 세피리나 대금, 거문고, 가야금 등의 관현악 반주를 동반하기 때문에 노래가 시작되기 전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다나베의 기행문 중 1921년 4월 11일에는 그가 총독부에 보관되어 있던 국악 관련 악서들을 살펴 본 다음, 삼청동에 있던 송병준의 별저에 초대되어 전통가곡과 궁중무용 등을 감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주에는 그가 살펴본 관련 자료들 중에서 《세조실록『(世祖實錄)》 악보를 비롯하여 성종때 편찬된 음악총서 《악학궤범(樂學軌範)》이나 《악통(樂通)》, 정약용의 《악서고존(樂書孤存)》, 《악장등록(樂掌騰錄)》 등과 그 외 각종 《의궤(儀軌)》 등 한국음악의 역사를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 등을 소개하였다. 다나베는 그 날 오후, 삼청동 송병준의 별저에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초수대엽이나 소용 등 가곡 여러 곡과 춘앵전을 비롯하여 장생보연지무, 검무, 사고무 등과 같은 악무(樂舞)로 그를 위한 최고의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 1876년(고종 13)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이 펴낸 가곡원류(歌曲源流) 다나베는 그 날 오후, 삼청동 송병준의 별저에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초수대엽이나 소용 등 가곡 여러 곡과 춘앵전을 비롯하여 장생보연지무, 검무, 사고무 등과 같은 악무(樂舞)로 그를 위한 최고의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1920년대 초, 조선의 음악관련 현상이나 사회정황 등을 일본인 다나베의 기행문을 통해 소개해 보고 있는 중이다. 경성(京城)에 하나밖에 없던 조선악기 제조 판매점은 안동상점(安洞商店으로 종로 견지동에 있었고, 거문고는 35엔, 장구가 15엔이었다. 현재 시세는 장구 10대 값으로도 거문고 1대를 구입하기 어려운 실정인 점을 감안하면 가격의 대비가 다르다. 또한 단성사에 가서 승무, 검무, 창극 춘향전, 판소리 심청가, 그리고 평양의 수심가와 경기 잡가 여러곡을 들었는데, 특히 나이 어린 소녀가 승무를 잘 추어 갈채를 받았다는 점으로 당시에도 승무는 인기를 끌었다는 점, 성악에는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창극이 또한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밖에도 평양의 수심가라든가 경기잡가 여러 곡을 춤과 율동을 곁들여 부르도록 연출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노래도 일반 대중들이 좋아했던 분야로 보인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음악에 관한 내용과 악보가 실려 있는 《세조실록(世祖實錄)》 단성사에서 일반인들이 즐기는 춤이나 노래를 감상한 그가, 다음날에는 고관대작의 초대를 받아 상류층이 즐기는 음악과 춤을 접하기도 한다.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국악속풀이에서는 다나베가 쓴 《조선. 중국의 음악조사기행》 속에 나타난 당시의 음악관련 상황이나 사회 현상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1921년 4월 1일, 다나베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부산 선창에 모여 있는 조선인의 옷이 모두 새하얗고 깨끗한 것을 보고 인상이 깊었다고 술회하였다. 조선인들이 왜 흰 옷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모르는 채 말이다. 당시 부산역에서 출발한 급행열차가 서울까지 10시간 정도 걸렸다는 점이나, 일본의 철도는 협궤(挾軌)인 반면 조선의 철도는 광궤이고 객차 내부도 널찍하며 흔들림도 적어 승차감이 좋았다는 이야기, 거리와 주택의 모습에서는 조선인들의 거리는 대체로 낮 동안만 활기가 있고, 밤이 되면 갑자기 적적해져 버린다는 점, 일본인 거리의 가옥은 지붕부터 건축양식이 직선적이고 딱딱한데 반하여 조선의 가옥은 작기는 하나 모두가 곡선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이야기, 창덕궁 앞의 소옥(小屋) <단성사>에서 기생춤, 즉 장고춤을 보았는데 몸을 구불거리고 발놀림이 자연스러워 재미있었다는 이야기, 이 당시에는 영화관을 활동소옥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무대에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의 아악을 이해하고 그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상진행과 전변상웅(田邊尙雄-다나베히사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상진행은 일본 궁내성 악부(樂府)의 책임자였고, 다나베는 부속 기관이었던 아악연습소의 강사였는데, 어느 날 그의 스승 상진행 악장으로부터 당시 조선의 아악부가 폐지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당시 총독부의 반응은 동물원과 아악부 중 동물원을 남기고 아악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아악부는 재정곤란을 이유로 악인들이 감축되고 있었다. 1917년 무렵에는 겨우 50여명이 남게 되었다가 폐지가 결정되면서 명완벽 등 6명의 노악사만이 남아 잔무를 처리 중에 있었다. 일본 악부의 책임자였던 상진행 악장 역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 다나베가 찍은 종묘등가악(宗廟登歌樂), 1921년 대 그렇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어온 아악부인가!! 저 멀리 신라시대부터 국가의 음악을 관장해 오던 음성서(音聲署)란 국가기관이 그 뒤 대악감이나 전악서 등으로 이름은 바뀌었으나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