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大東輿地圖란 朝鮮의 全域을 그리되 北은 穩城으로부터 南으로 濟州에 이르기까지를 22층에 난호아서 連하면 全幅이 一覽되고 分離하면 필요한 부분만은 따로 보게 하얏스며 다시 每一層식을 方冊形으로 접어서 접으면 卷이오 펴면 幅이 되게 하야 綜合及分區와 檢索及携帶에 모든 便宜를 꾀하얏스니 얼는 말하면 朝鮮全域圖를 크게도 보고 작게도 쓸 수 잇게 만든 가장 실용적의 新案임니다.” 위 글은 1926년 창간된 월간문학지 ≪별건곤(別乾坤)≫ 제12ㆍ13호(1928년 5월 1일 자)에 실린 육당 최남선이 쓴 “내가 자랑하고 십흔 朝鮮 것-七十年前에 單身調査, 獨力創製한 古山子의 大東輿地圖” 글 일부입니다. 최남선은 “대동여지도”가 조선에 있는 어떤 실용적 작품이나, 학술적 발명품보다도 빛나는 것이라 추켜세웁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국지도이면서도 보기 쉽고 가지고 다니기 쉽게 만든 지도로 평가되는데 전체를 펼쳐 이으면 세로 6.6m, 가로 4.0m나 됩니다. 최남선이 대단한 작품으로 추켜세운 까닭은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한 점을 꼽습니다.
“치어다보니 만학천봉이요, 굽어다보니 백사지로다. 허리 굽어진 늙은 장송, 광풍을 못 이겨 우쭐우쭐 춤을 출 제, 원산은 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촉촉, 뫼산이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주르르르르,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두 골 물이 한데 합수쳐 천방자 지방자 얼턱져 구비져 방울이 버끔, 저 건너 병풍석에다 마주 쾅쾅 마주 쌔려” 위는 “고고천변일륜홍”으로 시작하는 판소리 <수궁가> “고고천변” 한 대목입니다. 이 사설은 별주부가 처음으로 수궁 밖을 벗 어나 용왕의 병에 쓸 토끼의 간을 구하러 세상으로 나오는데 풍경이 모두 새롭고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벅찬 느낌을 담은 것입니다. “시내는 푸른 산을 돌아 이 골 물은 주르르르르, 저 골 물은 콸콸, 열두 골 물이 합쳐져 구비져서 물방울이 일고” 한자말이 섞이긴 했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소리라 하겠지요. 그만큼 자연을 기막히게 표현한 것으로 워낙 인기가 있어 진작부터 독립되어 불리고 있는 대목입니다. 판소리에서는 이 “고고천변‘처럼 가사 첫 머리를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나 <심청가>
지난 한글날 서울 세종로 미국대사관은 한글날을 축하하는 커다란 펼침막을 걸어두었습니다. 미국도 한글이 세계 최고의 글자라는 걸 알고, 축하해주는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미국대사관의 한글날 축하에 무척 놀라웠고 기쁜 나머지 그 밑을 괜스레 왔다갔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시내 곳곳에는 그와 반대로 알파벳병이 중증입니다. 종로나 대학로 같은 번화가 뿐 아니라 불광동이나 연신내 같은 곳에도 마치 미국 뉴욕 거리에라도 와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알파벳 간판 일색입니다. 요즈음은 오히려 한글로 된 간판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지요. 매일 타고 다니는 지하철 구내에서 보면 서울메트로는 미국회사인양 "DEGITAL METRO", "CULTURE METRO" 등 아예 알파벳으로 도배했고 옷 도매업체인 두타는 “EVERYDAY DUTA" 식으로 광고를 하던데 서울에 있는 미국인들을 위한 광고라서 그런가요? 지금 많은 외국인은 한국어를 배우려고 안달입니다. 국립국어원이 외국에 만든 “세종학당”이나 그밖에 다른 단체들이 세운 많은 한국어학당에는 외국인 수강생들이 한국어를 배우려고 오래 기다리는 형편이라고 하지요. 직접 한국으로 유학오는 학생들도 부쩍 늘었다고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 -쑥부쟁이 사랑, 정일근- 들이나 산길을 걷다가 흔히 만나는 쑥부쟁이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며 들국화로 흔히 잘 못 알고 있는 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마을에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대장장이) 딸이 있었지요. ‘쑥 캐는 불쟁이네 딸’이라 해서 ‘쑥부쟁이’로 불렀는데 그녀가 산에서 우연히 위험에 빠진 젊은 사냥꾼을 구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했던 사냥꾼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리다 지친 쑥부쟁이는 그만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버립니다. 얼마 뒤 그 자리에는 예전엔 못 보던 연보라빛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이를 쑥부쟁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쑥부쟁이의 꽃말이 그리움과 기다림일까요?. 사람들은 쑥부쟁이가 기다림에 지쳐서 넋이라도 나간 듯이 보인다고 합니다.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연한 보랏빛의 애처로움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쑥부쟁이는 매우 맛난 나물이라고 하지요. 무쳐먹거나 볶거나 튀김을 해먹기도하고 나물밥을 해먹어도 맛있습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일대는 신라의 9주5소경(九州五小京)에 해당하는 국원소경(國原小京, 이후 中原京)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남한강을 끼고 발달한 주변 일대에는 장미산성(사적 제400호),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누암리고분군(사적 제463호), 하구암리고분군, 중원탑평리칠층석탑(국보 제6호) 등 고대 삼국의 주요 유적들이 두루 분포하고 있지요. 그 중원경 유적지에서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범) 시굴조사 결과 4~5세기 때 백제 움집터(수혈주거지, 竪穴住居址)가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9동의 백제시대 주거지 가운데는 부뚜막 시설과 도랑을 갖춘 평면 ‘呂’자형의 대형 주거지도 포함되어 있구요. 그런가 하면 신라시대 대형 건물터는 물론 제철 관련 공방시설로 짐작되는 불에 탄 흙이 쌓여 있는 흔적과 광석을 제련한 뒤 남은 찌꺼기인 슬래그(slag)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2010년 7월 15일부터 시작된 이번 시굴조사는 6세기 중엽 신라의 중원 진출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고대도시의 실체를 고고학적으로 밝히려는 것인데 특히 신라 진출 이전에 들어서 있던 대규모 백제 움집터는 그간 충주 일대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던 백제 문
“옛 사람이 이르기를, ‘같은 성끼리 결혼하면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다.’ 했는데, 왕씨(王氏)가 5백 년 동안이나 오래도록 임금이 되었는데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였는즉, 혹 그런 이치도 있는 듯하였다. 성인의 제도를 지나쳐서도 안 될 것이요, 못 미쳐서도 안 될 것이다. 본조에 와서 결혼의 예법이 처음으로 바로 잡히어, 다른 성도 5, 6촌에서는 혼인을 하지 못하게 마련하였으니 좋은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위는 세종실록 50권, 12년(1430) 12월 18일(갑신) 1번째 기록으로 세종임금이 신하들과 고려조 동성 간 혼인 풍속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 41대 헌덕왕은 4촌 누이동생과 혼인하는 등 근친혼은 오랜 풍속이었습니다. 또 고려 임금들도 전 고려시대를 통틀어서 63건의 동족혼인이 있을 정도로 근친 사이의 혼인은 예사였지요. 그러한 근친 사이의 혼인은 오락가락했지만 고려 10대 정종 임금 때부터 금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본격적으로 근친 사이의 혼인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조선 초부터 “배불유양” 곧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면서
얼레빗 식구께 긴급 협조문을 보냅니다. 울주군에 있는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지금 파손되기 일보 직전이라 이에 대한 대책이 매우 시급합니다. 따라서 많은 시민이 반구대 암각화를 살리기 위한 서명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얼레빗 식구들의 작은 정성이 반구대 암각화 살리기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서명작업에 동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탁 말씀 올립니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사룀 * 덧붙인 서명용지에 이름을 써서 아래 누리편지로 보내면 됩니다. 접수 누리편지 : 김효소 mayolu@naver.com (010-2673-5384) 김선주 darkness0612@naver.com 010-9606-9662)
"새우젓 사려 조개젓 사려 / 초봄에 담은 쌀새우는 세하젓이요 / 이월 오사리는 오젓이요 / 오뉴월에 담은 젓은 육젓이요 / 갈에 담은 젓은 추젓이요 / 겨울 산새우는 동백젓이요" 이 노래는 이 장터 저 장터로 옮겨다니며 장사를 하던 ‘장돌뱅이’ 곧 부보상의 새우젓 타령입니다. “부보상(負褓商)”은 ‘부상’(負商) 곧 ‘등짐장수’, '보상(褓商)' 곧 ‘봇짐장수’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지요. 등짐장수는 나무그릇ㆍ옹기ㆍ젓갈 등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팔던 사람이고, 봇짐장수는 이와 달리 비교적 값비싼 필묵, 귀금속 등과 같은 정밀한 세공품(細工品)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팔던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 보부상은 옛날 농업생산자ㆍ가내 수공업자ㆍ시장상인 등과 소비자 사이의 물물 교환을 매개하던 장돌뱅이(행상)입니다. 이들 장돌뱅이는 한 곳에 터를 잡아 살지 못하고 타향을 떠돌며 고통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지난 9월 16일부터 10월 31일까지 “충남역사박물관”에서는 부보상 다시 길을 나서다라는 이름의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 이 가을 옛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장돌뱅이들의 애환을 보러 가실까요
연(蓮)은 6월부터 9월 사이에 피고 지기를 계속하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합니다. 흙탕물 속에서도 맑고 환한 꽃이 피는데 속세의 더러움 속에서 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하여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상징합니다. 연에는 수련, 백련, 홍련, 가시연, 왜개연, 노랑어리연, 흰어리연 등이 있습니다. 그 연잎으로 술을 빚는 아산 연엽주(蓮葉酒)를 아시나요? 연엽주의 유래는 조선 후기에 비롯됩니다. 당시는 가뭄이 들면 쌀 소비가 많은 술을 빚지 못하도록 금주령을 내렸는데 임금이 술을 못 마시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신하들이 차(茶)에 견주면 알코올 기가 있고, 여느 술보다는 도수가 낮은 약주 곧 연엽주를 빚어 임금이 마시도록 했지요. 연엽주는 크게 취해도 오줌 한 번 누면 취한 것이 깰 정도로 뒤끝이 깨끗하다는 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엽주는 아산시 외암리의 참판댁에서 빚는 술이고, 당진군 신평면의 신평양조장에서 빚는 백련 막걸리도 있지요. 또 비슷한 것으로 강릉지방 일부 양반 집안에서 빚어 마신 연엽식혜도 있습니다. 연잎에 찰밥과 엿기름을 넣고 삭혀낸 식혜로 연엽주라고도 말하지만 술보다는 식혜에 더 가까운 음료입니다. 깊어 가는 가을 우리술 연엽주
“북쪽 변경의 무지한 풍속에 매년 입춘 날에 장정이 벌거벗고 목우(木牛)를 몰게 하니 이를 우경(愚耕)이라 한다. 이 때문에 추위에 몸을 상해서 큰 병을 얻곤 한다."는 풍속을 들은 평양감사는 참찬 박충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랬더니 ‘북방 풍속이 그와 같다면 아주 무도한 일입니다. 또 사람까지 상하니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마땅히 알려서 엄금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위 글은 조선 중기 학자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보물 제260호 ≪미암일기(眉巖日記)≫ 에 나오는 “우경”에 대한 글입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그림엔 위 글처럼 농부가 따비라는 농기구를 들고 아랫도리를 벗고 남근을 내놓은 채 밭을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는 땅을 여성이라고 보고 음양의 조화를 통해 풍년을 비손하는 것으로 “나경(裸耕)”이라는 풍속입니다. 이 두 풍속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있어 온 것으로 짐작되지요. 이 시대의 눈으로 보면 이런 풍속들은 해괴하게 비칠 수밖에 없는데 옛사람들은 음양조화로 자손번성을 이루고 풍년이 오기를 빌었던 것입니다. 남근을 과장되게 만든 신라 토우(土偶, 흙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