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천하의 사대부들을 안정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지식인들을 장악해야 안정적인 통치와 국정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청나라는 먼저 어떤 학문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지 몰래 살폈는데 주자학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주자를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의 문하에서 나온 학덕이 뛰어난 열 명의 제자들)의 반열에 올려 제사 지내고 섬기며 주자의 도학을 황실이 대대로 이어온 가학(家學)이라고 선포했다. 주자가 중국을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한 인물인데도 황제는 천하의 선비와 도서를 모두 모아 《도서집성》과 《사고전서》 같은 방대한 책을 만들어 주자의 말씀이고 뜻이라고 했다.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주자학을 먼저 차지하고, 천하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아무도 감히 자기를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황제는 걸핏하면 주자를 내세워 천하 사대부들의 목을 걸터타고 앞에서는 목을 억누르며 뒤에서는 등을 쓰다듬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천하 사대부들은 그런 우민화 정책에 동화되고 협박당해, 형식적이고 자잘한 학문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주자의 학문에 흡족하여 기뻐서 복종하는 자가 있는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10. 23.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고맙게도 KBS 강석훈 기자가 문상을 와주었습니다. 강기자는 자기가 쓴 책이 곧 나온다더니, 10. 31. 초판이 나오자마자 나에게도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바로 《조선의 大기자 연암》이란 책입니다. 대(大)기자라니? 연암을 좋아하고 열하일기를 애독한 나로서는 순가 ‘대기자’에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강 기자가 연암을 ‘대기자’라고 부르는 것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머리말에서 강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하일기는 대기자의 면모와 식견, 실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장정의 르포르타주다. 르포르타주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특정 주제나 지역 사회를 심층 취재한 기자가 취재 내용과 식견을 바탕으로 뉴스와 여러 에피소드, 논평 등을 종합적으로 완성한 기사이다.” ‘그래! 기자의 관점에서는 《열하일기》에서 연암의 대기자의 면목을 읽어낼 수 있겠구나!’ 그런데 강 기자는 연암이 능숙한 대기자의 필치로 《열하일기》를 썼을 뿐 아니라, 연암 스스로 《열하일기》에서 자신을 ‘기자’라고 했답니다. ‘으잉? 이건 무슨 말이야? 당시에는 ‘기자’라는 개념도 없을 때 아닌가?’ 1780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240년 전 연암 박지원이 ‘열하’를 향하던 당시에 연암의 손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호곡장(好哭場, 좋은 울음터)이니 크게 한번 울어볼 만하다’ 한 요동벌판의 광활함을 응당 사진으로 기록하지 않았을까? ‘기이하고 우뚝 솟아난 이 산의 형세를 무어라 형용키 어렵다’ 한 봉황산을 실물 대신 사진으로 보여주지 않았을까? 사진가 박하선이 《열하일기》의 행로를 사진으로 쫓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008년부터 압록강 건너 만주 지역 일대와 요동벌판, 그리고 당시 연경이라 불렀던 북경 일대와 사신단인 연암 일행의 최종 목적지였던 열하(지금의 승덕)까지의 과정을 하나하나 톺아가면서 기록한 것이다. 지금껏 여러 사진가가 시도했으나 성과로까지 이어지진 못했는데, 오랜 두메 취재의 경험을 지닌데다 실체를 찾기 어려운 우리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를 사진으로 추적함으로써 ‘집념의 사진가’로 불리는 박하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접근이 어려워 한번도 제대로 기록된 적 없던 티베트고원의 장례의식을 담은 사진으로 2001년 월드프레스포토상(World Press Photo)을 받은 <천장(天葬)>의 사진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