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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우리 토박이말의 속뜻 - ‘밑’과 ‘아래’

[우리말은 서럽다 28]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위’의 반대말은 ‘아래’이기도 하고 ‘밑’이기도 하다. 그것은 ‘위’라는 낱말이 반대말 둘을 거느릴 만큼 속살이 넓고 두터운 한편, ‘밑’과 ‘아래’의 속뜻이 그만큼 가깝다는 말이다. 이처럼 두 낱말의 속뜻이 서로 가까운 탓에 요즘에는 ‘밑’과 ‘아래’의 뜻을 헷갈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 국어사전에서도 헷갈린 풀이를 해 놓았다.

· 밑 : 나이, 정도, 지위, 직위 따위가 적거나 낮음.
       ¶과장은 부장보다 밑이다. 동생은 나보다 두 살 밑이다.
 아래 : 신분, 연령, 지위, 정도 따위에서 어떠한 것보다 낮은 쪽.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이다. 위로는 회장에서, 아래로는 평사원까지…….

                                                                               《표준국어대사전》

‘밑’과 ‘아래’가 뜻으로나 쓰임새로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소리다. 하기야 ‘밑’은 ‘~ 따위가 적거나 낮음’이라 풀이하고, ‘아래’는 ‘~ 따위에서 어떠한 것보다 낮은 쪽’이라 풀이했으니 아주 같지는 않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 《표준국어대사전》의 '밑'과 '아래'의 풀이, 두 풀이가 조금도 다를 바 없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러나 ‘낮음’과 ‘낮은 쪽’은 무엇이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게다가 달아 놓은 쓰임새 보기를 견주어 보아도 다른 구석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동생은 나보다 두 살 밑이다.”와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이다.”에서 ‘밑’과 ‘아래’를 어떻게 다르다 하겠는가? “과장은 부장보다 밑이다.”와 “위로는 회장에서, 아래로는 평사원까지…….”에서도 ‘밑’과 ‘아래’를 다르다 할 구석은 없다.

그렇다면 ‘밑’과 ‘아래’는 본디부터 속살이 너무 가까워 뜻이 서로 겹쳐지는 낱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밑’과 ‘아래’는 본디 서로 아주 다른 낱말들이다. ‘밑’은 본디 ‘바탕・뿌리・터전’을 뜻하는 낱말이다. ‘위’와 짝을 이루지 않고 홀로 저만의 뜻으로 살았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땅 위에 자리를 잡으면 땅바닥에 닿는 데는 밑이 되어서, 바탕과 터전과 뿌리라는 뜻을 드러낸다. ‘밑구멍, 밑바닥, 밑절미(근본), 밑천(본전), 밑겨집(본처), 밑남진(본남편)’ 같은 낱말들이 예로부터 그런 뜻으로 쓰였다.

경기도 군포에는 수리산 아래 ‘산본’이라는 데가 있다. 꼭 일제 침략 시절에 생긴 이름 같아서 나이 드신 분들에게 알아보았더니, 요즘은 아파트뿐인 거기에 옛날에는 ‘산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반드시 ‘뫼밑’이었을 터이다. 본디 우리 토박이말로 ‘뫼밑’이던 것을 한자 ‘산’이 ‘뫼’를 밀어내어 ‘산밑’으로 바뀌고, 일제가 침략한 뒤로 끝내 ‘본’이 ‘밑’까지 밀어내어 ‘산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일제 침략 시절까지도 ‘밑’의 뜻이 ‘뿌리(본)’임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의 바탕과 뿌리와 터전인 ‘밑’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자리 잡는 것이고, 그런 밑에서 세상 모든 것이 생기고 자라나 위로 솟아오르는 까닭에, ‘위’와도 어쩔 수 없이 뜻의 인연을 맺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섬돌 밑과 위, 책상 밑과 위, 지붕 밑과 위, 나무 밑과 위’가 있는 것이고, 보다시피 ‘밑’과 ‘위’는 섬돌, 책상, 지붕, 나무같이 바닥에 닿아서 자리를 차지하는 무엇에다 쓰는 것이다. 이때 ‘밑’은 그 무엇이 땅에 닿는 데를 뜻하고, ‘위’는 그 무엇이 하늘에 닿는 데를 뜻한다.

‘아래’는 본디부터 ‘위’와 서로 짝을 이루어 쓰는 말이다. 뜻 또한 ‘위’와 ‘아래’는 서로 맞서는 것이니, 마음에 어떤 가늠자를 마련해 두고 그 가늠을 잣대로 삼아 높은 쪽을 ‘위’라 하고 낮은 쪽을 ‘아래’라 한다. 가늠이라 했지만 마음에다 그어 놓은 가늠인지라 늘 느슨하게 마련이다.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은 나를 가늠으로 하여 가르는 것이고, 윗도리와 아랫도리는 허리 어름을 가늠으로 쳐서 가르는 것이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은 우리가 사는 마을을 가늠으로 삼아서 가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밑과 위’는 부피가 있는 무엇이 땅이나 하늘에 닿는 자리를 꼬집어 뜻하지만, ‘아래와 위’는 어떤 가늠을 잣대로 하여 높은 쪽과 낮은 쪽을 느슨하게 뜻한다. ‘물위와 물밑’에서 ‘물위’는 물이 하늘에 닿은 데를 뜻하고 ‘물밑’은 물이 땅에 닿은 데를 뜻하는데, ‘물위와 물아래’에서 ‘물위’는 물이 흘러오는 위쪽을 뜻하고 ‘물아래’는 물이 흘러가는 아래쪽을 뜻한다. ‘밑’과 ‘아래’의 뜻을 헤아릴 만한 쓰임새의 보기다.

그러므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밑’을 “나이, 정도, 지위, 직위 따위가 적거나 낮음.”이라 풀이한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나이, 정도, 지위, 직위 따위’는 바닥에 닿아서 자리를 잡는 무엇이 아니라 위아래를 가르는 어떤 가늠이기 때문에, 쓰임새의 보기로 내놓은 “과장은 부장보다 밑이다.” “동생은 나보다 두 살 밑이다.” 따위는 마땅히 “과장은 부장보다 아래다.” “동생은 나보다 두 살 아래다.” 해야 올바르고 마땅하다.

온 누리 만물이 다 그렇듯이 낱말의 뜻이란 굳어진 채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바뀌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고,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사람의 삶이 바뀌는 것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낱말의 뜻도 따라서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나 온 누리 만물처럼 낱말의 뜻이 바뀌는 데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런 자연의 길은 자유로운 입말의 쓰임새에서는 여간해서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위적인 글말이 입말을 내리누르며 횡포를 부리는 곳에서는 틀어지는 수도 없지 않다. 이제까지 국어사전들이, 쉽게 붙들 수 없는 백성의 입말은 꼼꼼하게 살펴 싣지 않고 쉽게 눈에 띄는 식자들의 글말만 긁어모아 자연의 길을 뒤틀어 놓은 것이 적잖다. ‘밑’의 뜻풀이도 그런 뒤틀림의 하나다.

그리고 입말이든 글말이든 쓰는 사람들이 더러 잘못으로 빗나갈 수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잘못을 바로잡아 말을 올바로 지키고 가꾸는 일이야말로 국어사전과 국어 교육이 맡은 몫이다.

 

   
▲ ‘뫼밑’ 마을이 ‘산밑’ 마을을 거쳐 ‘산본’으로 뒤틀려도 아무도 바로잡지 않는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뫼밑’ 마을이 ‘산밑’ 마을로 잘못 빗나가고 끝내는 ‘산본’으로 뒤틀려도 누구 하나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 ‘밑’과 ‘아래’가 서로의 뜻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얽혀 헷갈려도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는 조상이 물려주신 값진 유산을 가꾸기는커녕 지키지도 못하고 어름어름 살아가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머지않아 두 낱말 가운데 하나는 쓸모가 없어져 시들다가 죽을 것이고, 그만큼 우리네 말글살이는 여위고 가난해지는 것이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밑’의 쓰임새는 입말에서 자주 듣는 것이고 잘못 쓴 것이 아니므로 눈여겨 둘 만하다.

㉮ 아무개는 계모 밑에서 자랐으나 얼굴에 어두운 구김새가 없다.
㉯ 어려운 조건 밑에서도 굽히지 않고 뜻한 바를 이루어 냈다.
㉰ 아무개는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 뛰어난 학자는 거의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들이다.

㉮와 ㉯는 ‘계모’와 ‘조건’이 마치 땅바닥에 닿아서 내리누르는 무엇인 것처럼 뜻겹침(비유)하여 쓴 것이고, ㉰와 ㉱는 ‘할머니’와 ‘스승’이 ‘할머니의 사랑’과 ‘스승의 가르침’을 뜻겹침하여, 그런 사랑과 가르침에 흠뻑 젖어 있었음을 뜻하여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아래’로 바꾸어 쓰면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낱말이든 뜻넓이를 펼치면서 뜻겹침을 하여 쓰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살찌우는 지름길일지언정 틀린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