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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진방남 ‘불효자는 웁니다’

[디제이 김상아의 음악편지 80] 눈물로 부른 절절한 사모곡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어머니 어서 들어가세요. 꼭 성공해서 모시러 올게요.”
“가더라도 비 그치면 내일 가거라.”
“아닙니다. 마음먹었을 때 떠나야지요.” 

어머니 옆에서 눈물을 훔쳐내는 동생들에게 집안일을 당부하고 스물한 살 청년 박창오는 그렇게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고향을 떠났다. 차창에 기대어 밖을 보니 떠나가는 그가 미웠는지 고향 산천들도 고개를 등지며 돌아앉았다. 

종가의 장남으로서 쇠락한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는 신념으로 타관 길에 오르긴 하였으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그럴수록 박 청년은 이를 악물며 마음속으로 성공을 다짐했다. 어스름해서야 청주역에 내린 그는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물어물어 숙부님 댁을 찾아갔다. 전신국 기술자로 근무하는 숙부와는 이미 자신의 출향의사를 서신으로 상담하였고 숙부도 도움을 주겠노라 약속한 상태였다. 

“네 편지를 받고 고민해 보았는데 너는 손재주도 좋고 하니 양복기술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느냐?” 

청년 박창오의 첫 타향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던 그는 견습생 일이 고달플 때면 노래로 노곤을 달랬다. 그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곧 청주 일대에서는 ‘노래하는 양복쟁이’로 통하게 되었다.
 

   
▲ 진방남 ‘불효자는 웁니다’ 수록 음반 표지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 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 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요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
고생하신 어머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가셨나요
그리운 어머님 

 

그 청년이 바로 가수 진방남이요, 작사계의 거성 반야월이다. 

청주지역 콩쿠르을 휩쓸던 그에게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가 주최하는 전국 콩쿠르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대회장인 경북 김천으로 달려가 우승을 거머쥐며 가수자격을 얻었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꼭 성공해서 어머니를 모시러 가겠다고 한 맹세를 되새기며 참았다. 이제 겨우 예비가수가 되었을 뿐 아직 성공한 게 아니었다. 

이듬해인 1940년 그는 태평레코드와 정식계약을 맺고 취입을 위해 일본 오사카로 향했다. 녹음실 앞에서 데뷔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연습하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중 한 장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모친별세’ 

촛농이 녹아 흐르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비 내리는 마산역에서 우산을 씌워 주시며 아들 앞에 닥쳐올 고난을 걱정하며 눈물지으시던 어머니! 그때 그 모습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단 말인가? 숨이 멎도록 울고 또 울었다. 

한 걸음에 달려가야 하나 며칠을 가야하는 먼 길이었다. 더군다나 개인의 사정 때문에 회사의 중대한 일정을 바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 다음날 한 맺힌 목소리로 녹음한 그 노래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 진방남은 데뷔 하자마자 일류가수가 되었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감사, 전 한국교통방송·CBS D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