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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화서 이항로와 류인석 유적지를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양인선 기자] 어제(17), 화성시 광복회(지회장 안소헌)회원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 서종면 벽계에 있는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생가 기념관을 찾았다. 경춘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만해도 이곳은 경기도의 오지 가운데 오지였다. 구한말 정통 보수주의 이념이었던 위정척사의 발원지였고 불퇴전의 중부지방 항일의병의 산실이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 선비들은 조선이 지켜온 성리학적 질서를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여겼다. “목숨을 바쳐 정의를 이루라는 의리론과 사생관이 그것이다


     


독학으로 주자학을 깨친 화서는 나이 서른에 이르러 그의 명성이 경향각지에 퍼졌고, 눈 밝고 뜻 굳센 이들이 벽계로 모여 들었다.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성재 류중교, 의암 류인석, 운암 박문일 그리고 하거 양헌수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제자만 450여명, 제자의 제자까지 합치면 수천 명에 이르며 이들은 화서학파를 이뤘다.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맞선 이들이 화서학파 사람들이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이렇게 단언했다. “의병정신은 반만년 역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민족정신이요, 선생은 그것을 깨달아 전달한 선각자였다.”

 

면암 최익현은 을사늑약 후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대마도에서 모든 음식을 거부하다가 옥사했다. 의암 류인석은 을미의병을 일으켜 한때 중부지역을 석권했으며 1910년 병탄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통합체인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되었다가 그곳에서 순국했다.


 

 


만주지역의 류인석 안명근 안정근 안중근 안홍근 조병준 이세영 등, 상하이 임시정부의 박은식 김구 김승학 엄항섭 황종관 등, 광복군의 조병준 김승학 신우현 신연감 백의범 조병선 변창근 박이열 홍식 신동열 등이 그의 제자였다. 화서학파에서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이는 233명이고 이 가운데 103명은 순국 순절했다.

 

화서는 벽계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생가 동쪽 느티나무 밑에 축대를 쌓고 강학의 터로 삼았다. 제월대(비 갠 하늘의 티 한 점 없는 달빛)에는 이런 시가 새겨져있다.

 

작은 구름이라도 보내어/ 맑은 빛에 얼룩지우지 말라/ 지극히 맑고 지극히 밝으니/ 태양과 짝하리라.” 위정척사의 의기가 오롯하다.

 

화서 이항로 선생 유적지를 뒤로하고 이어서 서종면 벽계계곡을 구불구불 돌아 강원도와 경기도 접경지역에 있는 춘천시 남면에 위치한 류인석(柳麟錫, 1842~1915) 의병장 유적지로 향했다. 이곳은 의암이 태어나 6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류인석은 6세에 양평으로 양자를 가서 거기서 의암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는다. 의암은 55세 되던해인 1986년에 영월에서 의병봉기를 촉구하였으며 제천 충주 등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어 만주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915년 중국 봉천현에서 서거하였다. 1935년에 고향으로 무덤을 옮겼으며 2004년에 국가 현충시설로 정비되되 이곳은 현재 나라사랑 교육활동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화서 이항로 선생과 의암 유적지를 돌아보며 혼령이나마 평안하길 빌었다. 욕심으로는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어느 때 보다 자주외교가 중한 지금, 조국의 번영과 평화를 지켜주길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