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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사라져 버린 마포의 복개당(福介堂) (1)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19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복개당(福介堂)은 서울 마포에 있었던 있었지만 1977년부터 1978년 사이 도시화 물결 속에서 사라졌다. 이 글에서는 복개당이 없어진지 수십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부분적으로 남겨진 기록 자료와 실물자료를 토대로 민속 현장의 과거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마을민의 신앙처로 자리매김 되었던 당의 유래, 의미, 남겨진 무신도, 의례 내용 등을 살펴봄으로써 변화 속에서의 서울지역의 마을신앙 한 면을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거 것에 대한 지난 ‘민속쓰기’에 가치를 두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사라져간 또 다른 민속현장의 실체를 담론화 작업에 필요하게 여겨질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 시피, 전국의 많은 신당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근대화, 도시화, 서양화 바람과 함께 전국의 수많은 유무형 민족유산들이 자취를 감추면서 곳곳의 신당들도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80년대부터 본격화된 국토 개발사업의 하나로 급속하게 진행된 곳곳의 아파트와 고빌딩 건축, 도로 신설과 확장 등이 큰 요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 땅에 전래되어온 묵은 민족의 신당들이 급속하게 사라지게 된 것이다. 서울지역만을 예를 들어도, 그 유명한 할미당, 사신성황당, 금성당 등이 그러한 개발에 의해 없어진 사례이다.

 

 

지역의 마을 신당은 마을민의 대동단결, 무사태평, 부귀영화, 수명장수 등을 위해 세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신당들은 기나긴 시대적 흐름과 함께 민족 신앙의 산실로서 그 사명을 다 해 왔었다. 아직도 전국에는 성스러운 위엄과 신비스러운 영검을 갖고 지역민의 보호처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마을당들이 무수히 많다.

 

또한 신당에서 베푸는 정기적 의례는 현재적으로 재해석되어진 신명풀이로 명분화하여 우리 삶 속에 파고들어 원활한 전통문화 전승이 이어지도록 역할을 다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당과 그에 따른 대동적 의례를 살아있는 마을신앙의 현주소라고 말하곤 한다. 복개당도 그러한 역할을 하면서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개당은 그 옆으로 찻길이 뚫리게 되어 주변 건축물들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당시 전통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단순해서 대부분 사람들이 복개당에 대한 문화재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 정책도 전통문화 전승이나 문화재 보호에 관심 갖기 보다는 국토 개발과 산업화에 보다 집중하였을 때이기에 마을 신당이 헐려 나가는데 누구하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신처럼 인식된 당이 없어지는데 오히려 앞장서서 이를 처단하는 것 마냥 허물어냈다. 이렇듯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복개당이 철거되는데 반대하는 마을사람 하나 없었다. 그야말로 당에 대한 사회적 적대와 문화재 보호에 대한 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성스러운 복개당은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수백 년 동안 마을의 성소로써 지역 역사와 문화 그리고 마을사람들의 삶을 책임져온 당과 당신이 하루아침에 바람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당시 복개당 철거 소식을 접하게 된 조자룡(사립 에밀레박물관 건립자 및 관장)이 건물을 옮겨가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조자룡은 미국 하버드대에서 구조공학을 전공한 건축가이었지만 우리나라 민화, 도깨비문화, 삼신신앙 등에 몰두하면서 그에 따른 민속자료를 수집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사재를 들여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에 에밀레박물관을 건립하였고 전국 각처에서 개발로 헐려 나가는 고 건축물을 수습하여 자신의 박물관 뜰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던 중,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개발사업소 현장 책임자인 친우 소개에 따라 마포 복개당 철거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철거 소식을 들은 조자룡은 서슴지 않고 복개당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하여서야 복개당이라고 하는 마을당임을 알게 되었다. 건물이 일반 가옥이었다면 쉽게 철거를 했겠지만, 신령을 모셔둔 마을의 공동 신당이어서 조자룡 자신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당은 마을 공동 소유로 되어 있었지만 당 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가 없어 철거 작업에 대한 합의를 이뤄 내는데 쉽지가 않았다. 조자룡은 다수의 마을사람들을 상대로 건물 철거를 논의했다. 결국 마을당에 대한 하직 제의를 베풀고 마을 노인당에 일부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철거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조자룡은 마을사람들 요구에 따라 통돼지 및 제물 등을 준비하였고 복개당 하직의례가 조촐하게 행해지는데 제의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 뒤, 복개당 건물을 헐어냈다. 복개당에 딸린 유물들도 조자룡에 의해 수습되었다.

 

 

 

복개당은 서울지역의 전형적 신당이었다. 목조기와로 된 일자형 신당이었는데 중앙과 좌우를 구분 짓는 기둥 4개가 신당 안쪽 중앙에 앞뒤좌우로 대들보를 받치고 세워져 있었다. 신당에는 현판이 걸려있었고,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던 중수기도 신당에 걸려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사람들이 당을 드나든 흔적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마룻바닥은 매끈하였고 도구 및 물건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신당 분해는 고 건축물을 해체하는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해체된 건물 자재들은 하나하나 일련번호를 적은 후 묶음으로 정돈하여 화곡동의 에밀레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후, 묶여둔 건축물 자재들은 수년이 지났지만 조립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3년 에밀레박물관이 충청북도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 입구로 옮겨지게 되자 자재들도 함께 그곳으로 옮겨졌다.

 

조자룡은 지속적으로 전국 곳곳에 허물어져 가는 고 건축물들을 해체하여 에밀레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들여온 건축물 자재들이 에밀레박물관에서 조립되는 과정에서 복개당 자재 일부가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개당 건축물 대들보를 분해하게 되었는데 대들보 중앙 부분에 구멍을 파고 넣어 두었던 은 조각품 부적이 발견되었다. 육각형 여섯 귀퉁이에 ‘水’ 자 여섯 개를 둘러 새겨서 만든 것인데, 이러한 육각형 조각품 다섯 개가 동, 서, 남, 북, 중앙을 뜻하는 다섯 방향으로 서로 뭉쳐 있었다.

 

이것은 화재를 막는 부적으로써 많은 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묘(淼)부적이었다. 주로 궁궐이나 지위가 높은 건축물에서 쓰이는 부적이다. 그럼에도, 복개당 건물 자재들은 이러 저리 흩어져 조립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고, 2000년 조자룡이 75살에 삶을 마감하게 되면서 그 흔적도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마포 복개당 건물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옛 정취는 물론이고 그 흔적조차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복개당에 모셔졌던 무신도 및 관련 유물 일부만이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당시 에밀레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했던 윤열수(가회민화박물관 관장)가 당시 복개당 유물 수습에 참여하였다.

 

윤열수는 철거 직전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당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복개당 안팎을 사진촬영 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복개당이 소개되었는데, 조흥윤이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보고서를 토대로 소개하면서 <복개당 외부 전체 모습> 사진과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한 <세조대왕 존영> 사진은 윤열수가 현장에서 찍은 마지막 기록사진이었다.

 

1990년 서울시에서 《서울민속대관》을 펴낼 때 민간신앙을 조사하였는데 이때 대부분의 조사 내용은 이미 무라야마지쥰의 보고서에 나온 내용들이다. 이 조사에서 단지 주민 2명이 제보자로 선정되었는데 증언한 내용이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이 말을 타고 가다가 말굽이 붙어서 가지 못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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