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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삼각산 도당, 꿈속에 불덩어리 몸에 떨어져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33] 삼각산 도당 3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삼각산 도당굿 제차

 

삼각산 도당굿을 하기 위해서는 전날 오후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다리에서 거리제를 먼저 지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다리에서 황토 물림을 한 후에 당굿을 시작한다. 삼각산 도당굿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거리제 - 거리의 홍액을 막고 도당으로 들어가는 길을 튼다.

2) 황토물림 -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황토를 뿌려서 좋지 못한 해로운 액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3) 주당물림 - 쇳소리 가죽소리를 내어 굿의 시작을 알리고 도당을 정화한다.

4) 앉은청배 - 만신이 장구를 치면서 모든 신을 불러들인다.

5) 산신거리 - 삼각산 산신 및 모든 산신을 모셔 놀린다.

6) 도당모셔오기 -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를 굿당으로 모셔 온다.

7) 만신말명거리 - 당주만신ㆍ삼각산 도당과 관련된 말명신을 놀린다.

8) 불사거리 – 불사신을 모시고 놀린 후, 신장, 대감, 창부 등을 놀린다.

9) 대감거리 - 대감시루의 팥시루떡을 반쯤 꺼내어 흰 보자기에 싸서 짊어지고 흥겹게 대감신을 놀린다.

10) 작두장군거리 - 쌍작두를 타고 공수를 내린다.

11) 사냥거리 - 사냥을 나가 노루, 닭 등을 잡아 신에게 바친다.

12) 소지올림 –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를 축원하며 소지를 올린다.

13) 영산 – 마을 사람들의 조상을 좋은 곳으로 천도한다. 또한, 요절하거나 횡사하여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랜다.

14) 도당모셔들이기 – 모셔 와서 놀렸던 도당신을 다시 원위치로 모셔다드린다.

15) 뒷전 - 여타의 잡귀 잡신을 먹여 놀리고 굿을 마무리한다.

 

삼각산 도당굿의 당주무녀, 집안에 신 모신 내력 없어

 

삼각산 도당굿은 오래전부터 당에 매인 당주무녀가 있었다. 당주무녀는 당굿을 함께 진행할 무당들과 악사들을 섭외하여 데려오고 당굿을 지휘하게 된다. 삼각산 도당굿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인 2000년 당시의 당주무녀는 김명석(金命石, 1932-2009)이었다. 김명석은 삼각산 도당굿이 2010년 11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기 전인 2009년에 사망하였지만, 필자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 서울굿의 큰만신이었다.

 

 

김명석 이전의 당주무녀는 김명석보다 11살 위인 ‘석수이 마나님이었다. 석수이 마나님은 14살에 임무 하여 서울 정통굿 전승자로 오랫동안 삼각산 도당굿을 주관하다 나이 들고 기력이 좋지 않게 되자 90년대 초 김명석 만신에게 당주 권한을 물려 준 것이다. 당주 대물림은 사제 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러하지는 않다. 석수이 마나님과 김명석의 관계는 선후배 사이며 사제 간은 아니다.

 

김명석은 사망하기 전까지 서울시 강북구 수유1동 475-131번지 대성빌라 202호에서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김씨가 거주하였던 수유1동은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서 과거 마을풍경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화하였지만, 한때는 수유리 빨래골이라 불리었던 곳이다. 그래서 김명석 만신의 오랜 단골들은 ‘빨래골 꽃방집’이라 해야 김명석 만신을 쉽게 기억하였다. 꽃방집은 김명석의 스승이 가졌던 별호였고 그 칭호를 대물림하였다.

 

김명석 만신은 서울 사대문 안 종로 5가에서 85대가 한 지역에서만 살았던 서울 정통 토박이의 부유한 양반집 9남매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김명석은 어려서부터 영특했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는 외가나 친가 누구도 신을 모셨던 내력이 없었다.

 

9살 때 꿈에서 깬 뒤 영험한 소리 시작

 

그런데 그녀 나이 9살 되던 해 5월 초 열흘, 밖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다가 그만두고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 꿈은 캄캄한 밤이었고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갑자기 하늘이 둘로 갈라지면서 금으로 된 상복 입은 상제(상주)들이 한 무리가 왔다 갔다 하였다. 얼마 후,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상복을 입은 수많은 상제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쿵’ 하면서 커다란 돌멩이가 굴러 왔다.

 

굴어 온 돌멩이가 별안간 새빨간 불덩이로 변하더니 김명석 몸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김명석은 이때부터 영험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9살 먹은 아기 김명석은 꽃방집이라고 하는 당시 나라만신집으로 손뼉을 치면서 뛰어 들어갔다. 꽃방집은 과거 양사골 들어가는 입구였던 느릿골(현재의 방학동)에 살다가 용머리(용두정)로 옮겨 살고 있었다.

 

꽃방집에서는 김명석이 신이 잡힌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부터 김명석은 신어머니 꽃방집에서 에게 굿을 배웠다. 그리고 김명석 나이 13살 때 신어머니 꽃방집은 80을 갓 넘기고 사망하였다. 한편, 김명석 신어머니는 아들은 하나인데 며느리가 둘이었다. 두 며느리 모두 만신이었다. 신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꽃방집굿제는 김명석과 함께 두 며느리에게서도 학습되어 졌다.

 

 

아들만 낳고 딸을 낳지 못하다 김명석이 태어나자, 집안 어른들은 모두 딸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김명석은 어려서부터 온갖 귀염을 받고 자랐다. 그런데 갑자기 무당이 내렸으니 집안은 난리가 났다. 김명석의 어머니는 무당 내린 딸을 한탄하며 울고 다녔고, 아버지는 아기를 죽이던지 가서 버리든지 하라고 소리쳤다.

 

하루는 어머니가 너 죽고 나 죽고 하자며 칼을 가지고 딸을 잡으려고 쫓고 쫓기는데도 김명석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신이 내린 김명석은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무당이 되는 과정에서도 신병을 앓지도 않았다. 한편, 김명석 집안은 부유했으나 그가 신이 내린 뒤로 점차 가세가 기울였고 끝내 망하고 말았다.

 

옛날에는 나라만신이 되면 말을 타고 다니며 굿을 하였는데, 김명석 신어머니 꽃방집이 그러하였다. 꽃방집은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던 전설적 무당이었다. 궁을 드나들며 굿을 하였던 큰무당이었고, 양반집 굿도 많이 하였다. 김명석도 신어머니를 따라 두 번이나 궁안으로 굿하는데 따라갔었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넋만신하면 꽃방집이었을 정도로 죽은 망자를 위한 진혼굿이나 조상굿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김명석은 신어머니를 따라 관넋도 세 번이나 따라갔었다. 관넋은 만신을 초상집으로 불러서 하는 푸닥거리이다.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입관한 뒤, 관 뒤편으로 병풍을 치고 관 앞에 넋상을 차려 놓는다. 무당이 관 앞에 앉아 넋(혼)을 청하면 죽은 망자의 혼령이 무당에게 들어온다. 무당은 관넋을 통해 죽은 영혼을 불러들이고 망자와 상주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한다.

 

이때 망자는 상제와 가족을 모두 다 찾고 살아생전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관넋은 경우에 따라선 무당을 초상집으로 부르지 않고 출상 전날 망자를 입관한 다음 무당집으로 가서 하기도 한다. 무당에게 망자의 나이와 성명을 말하면 냉수, 날두부, 밥 세 중발, 콩나물 한 접시를 준비하여 행한다. 무당이 관넋을 마친 뒤 다음날 상주들이 장지에 갔다 오면 집가심(자리걷이)을 한다.

 

김명석은 신을 모시고 있으면서 17세 살 되던 해 시집을 갔다. 삼양시장 근처에 거주하다가 18세가 되던 해에 빨래골로 이주하였다. 김명석의 남편은 6.25 당시 28세에 전사하였다. 남편 사망 후, 결혼은 안 했지만 한 남자와 30년을 살다가 그 남자도 사망하였다. 자녀는 딸 2 아들 1명을 두었는데, 큰딸은 업으로 들어왔다. 김명석은 무업을 시작할 때 많은 전안에 무신도를 모셨지만 모두 당으로 내모셨다.

 

그러나 단골들이 자꾸 찾아와 할 수 없이 또다시 장롱 안에 조그마한 신당을 차렸다. 장롱문을 닫으면 그 속에 신당이 모셔져 있는 것을 모르도록 한 것이다. 김명석의 신당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비롯한 일월성신과 관운장 그리고 전을 말려 모셨다. 전이라는 것은 하얀 한지로 신의 형상을 오려서(말려서) 벽에 걸어 두는 것이다. 전을 말려두는 것이 서울 무당들의 오랜 관습이고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