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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서산 천년고찰이었던 보원사터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산 개심사는 상왕산 서북쪽자락에 있다. 그런데 상왕산의 서남쪽 계곡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서산마애삼존불 근처는 보원마을로 이곳은 1970년대 까지도 농촌마을과 목장으로 소떼가 풀을 뜯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문화재지표조사결과 절터로 판단되어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거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고, 이곳이 고려시대 크게 융성했던 보원사터임이 밝혀졌다.

 

보원사터는 약 3만평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발굴결과  큰 석조(물을 담은 큰 돌그릇)은 보물 102호, 당간지주는 보물 103호, 오층석탑은 보물 104호, 법인국사보승탑은 보물 105호,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불좌상(문화재지정을 아직 못받음) 그리고 수많은 소불들 등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현재 보원사터에는 절의 입구에 높이 서있던 당간을 받치던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가 남아 있으며, 이 석물들은 다행히도 땅속에 잘 묻혀 있어서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이다. 땅위에 노출되었더라면 손상되었을 것인데, 흙속에 묻혀있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박물관에 이전되어 있는 보원사터 철불좌상은 높이가 무려 257cm에 이르는 거대한 철불로, 철불위에 금도금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처님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미적 감각과 얼굴의 표정이 매우 당당하게 표현되었다.  또 법인국사의 탑과 탑비 또한 세밀한 조각과 아름다운 균형미가 돋보인다.

 

또 높이 9m에 이르는 오층석탑은 불국사 석가탑과 같은 양식의 석탑으로, 2층기단위에 탑신과 옥개석이 5개층이며 맨 꼭대기에는 상륜부가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상륜부에 가운데에 있는 찰주(상륜을 세우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대부분 쇠로 주조된 원뿔형 구조물)만이 남아있고, 찰주에 꽂혀있던 다양한 모습의 보석같은 장식물은 없어지고 말았다. 전체적인 구성은 불국사 석가탑의 형식(정4각평면의 2층기단 위에 목조건축양식을 본뜬 탑신+옥개석이 있고, 그 위에 상륜부가 있는 형식)이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삼층석탑 보다는 오층석탑을 좋아해서 층수가 많아지는 시대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원사터오층석탑은 1층기단의 각면에는 3개씩 4면에 12가지의 동물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방위별 12지신을 새긴 것으로 보이며, 2층기단의 각면에는 2개씩 4면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어, 탑을 하나의 부처님세계로 보고 기단부에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들을 배치하여 매우 정성을 드린 석탑으로 보인다. 기단위 1층 탑신부에는 돌출한 받침돌이 있어, 목조건축물의 누각에 난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터오층석탑은 백제지역의 석탑으로 각층 옥개석은 신라지역의 석탑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백제의 지역적 특성과 그 지역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신라지역의 석탑들이 옥개석의 지붕면이 두껍고 처마선이 수평에 가까운데 견주어, 백제지역의 석탑들은 옥개석의 지붕돌이 상대적으로 얇다는 것이고, 처마선이 완만한 곡선으로 양쪽 끝으로 가면서 살짝 더 들려있다.  보원사터오층석탑은 이런 석탑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상륜부만 없을 뿐 손상된 부분이 거의 없어, 백제석탑을 감상하는데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하였다.

 

보원사는 본래 백제시대에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초 탄문(文, 900~975 후에 법인국사로 추존)스님이 주석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어머니가 꿈에 귀신을 만난 후 임신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법인국사는 출가하여, 당시 가장 큰 종파를 이룬 화엄학에 몰두하였고, 이에 남다른 법력이 쌓여, 고려태조 왕건의 왕후인 유씨의 득남을 기도하여 왕자를 낳게 한 후, 왕건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며, 왕후 유씨에게 태어난 왕자가 후에 제4대 광종이 된 후에는, 지위도 더욱 높아지고 왕실과 더욱 깊은 관계가 되어 존경을 받았다.

 

탄문스님이 50살에 이르러 949년 광종이 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스님은 개경 대궐에 초청되어 설법을 하였고, 이후 개경의 왕실사찰인 귀법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광종의 추대로 왕사가 되었다.

 

탄문스님은 광종 때 귀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도 철조장육상을 조성하여 보원사에 모셨다고 전하는데, 그 장육상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전시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탄문스님은 노환을 빌미로 광종 26년(975) 왕사에서 은퇴를 청하여 국사로 추존된 후, 서산 보원사로 내려가 머물렀으며, 그해 3월 열반하여 광종으로부터 법인(法印)이라는 시호와 보승()이라는 탑호를 받았다. 이때가 보원사의 융성기였으며, 이후 고려시대 동안에는 융성했으리라 여겨진다.

 

상왕산 아래 넓게 펼쳐진 보원사터를 탐방하고, 그곳에 남은 석조유물들을 돌아보니, 새로운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잊혀져 땅속에 묻혔던 석물들이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 오히려 감개무량한 생각이 들었고, 그 큰 절이 흙으로 덮여 소들을 먹여살리는 목장이 되었다가, 다시 우리앞에 유적지로 보호되어 옛 선사의 채취를 다시 느끼게 됨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지금 보원사터의 한쪽에는 보원사 복원을 기원하며 가설건축물에 임시법당을 짓고 기도하는 스님이 있었다. 언젠가 다시 금당위치에 건물이 세워지면 보원사에서 발굴된 석불이 다시 돌아올 것이지만, 그 때가 언제쯤일지는 꼭 다시 돌아올 날을 기원해본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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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