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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담양의 식영정, 취가정, 독수정을 거닐다

광주호 주변 물가 언덕 위에 지은 정자들-2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가사문학의 본거지인 담양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다. 그 중에 오늘은 식영정, 취가정, 독수정을 돌아본다.

 

식영정은 지난번 기사에 본 송강정 환벽당과 함께 송강 정철이 거하면서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등을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래 식영정은 김성원이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정자로, 식영정이란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정자로 한칸 온돌방 하나가 있고, 나머지 3칸은 마루가 깔린 대청이다.

 

식영정의 아래에는 서하당이 있는데 이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인 '서하당'을 건물의 이름으로 붙인 것이고, 그 옆에는 부용대가 있는데 부용대 앞에는 연꽃을 심은 연못이 있어 여름이면 그 연못에 부용대가 비쳐 정자는 작지만 연못에 다리를 뻗고 있는 모습이 거울처럼 비추어 선계를 보는 듯 아름답다.

 

김성원은 정철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당시 이곳에 머물던 4명의 문인을 천상의 신선처럼 식영정 4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다. 이들은 이곳 성산의 경치좋은 곳 20곳을 택하여 각각 20수씩 시를 지었는데 이를 모두 합하면 80수다. 식영정 옆에는 송강집 목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거닐던 자미탄,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 조대 서석대 등이 있으나, 지금은 광주호의 물속에 잠겼다.

 

취가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충장공 김덕령이 출생한 곳으로 지난 번 기사에 있는 환벽당의 남쪽 언덕에 있다. 취가정과 환벽당의 거리는 약 300m정도된다. 이 정자는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1890년 후손 김만식이 세웠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난 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허전한 터로 남아있던 곳에 후손들이 다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취가정을 세우게된 까닭은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어느날 권필(1569~1612)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한 맺힌 사연은 노래로 「취시가(醉詩歌」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자 권필은 꿈속에서 김덕령 장군의 혼령에게 '하늘의 뜻을 어찌 하리요' 하면서 위로하였다. 이런 연유로 건물은 나중에 지었지만 정자 이름은 '취가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끝으로 독수정은 조선초 서은() 전신민()이 지은 것으로, 독수정은 이백의 시구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죽었네" ”( 西)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고려말 공민왕때 안무사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낸 인물로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들어서자 이곳에 들어와 숨어서 살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말 함께 전장을 누비던 전신민을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전신민은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지키며 매일 아침 고려조복을 입고 송도를 향하여 곡하고 절을 하며 살았다.

 

광주, 담양 일대의 정자들을 돌아보면서 자연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산 송강 정철을 비롯한 문인들과 이와는 달리 망한 나라의 충신으로 자신의 지조를 지키고자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버리고 살다간 선인들의 삶 등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봄 바람이 먼 발치에서 불어오는 가운데 남도의 정자 답사는 매우 뜻깊은 여정이었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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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