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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또 한 사람의 돈키호테, 강원대 성원기 교수

한국의 돈키호테와 다람살라 방문기 (8)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점심 식사를 끝낸 뒤에 병산이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였다. 통화를 끝내더니 지금 탈핵 깃발을 들고 한국에서 매일 걷고 있는 강원대의 성원기 교수가 내일 (2월 24일) 판문점에 도착한다고 전해준다. 성원기 교수는 나도 잘 아는 분인데, 국내를 걸으면서 탈핵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분이다. 성원기 교수는 어떤 인물인가?

 

강원대학교 전자공학과 성원기 교수는 삼척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시골집 근처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원전이 집 근처에 세워지면 자기와 가족은 안전할까? 사고라도 나면 얼마나 위험할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원전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원전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지만 그가 원전 건설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원전 마피아와 싸울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는 답답했다. 그는 미약함과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미약한 개인이지만 자기 집 근처에 들어설 원전을 막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2013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부산의 고리에서 출발하여 동해안 길을 따라 북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배낭에는 ‘핵발전소 이제 그만’이라는 작은 플래카드를 붙이고 혼자서 걸었다. 그는 따가운 여름 햇볕을 받으며 계속 걸었다. 휴전선에 막혀 더 이상 북쪽으로 갈 수 없자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걸었다. (이 대목에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난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걷는 대신 뛰었다.) 그해 여름 방학이 끝날 때에 그는 서울의 광화문에서 ‘나홀로 순례’를 마쳤다.

 

그 후 성원기 교수는 매년 방학이 되면 원전에서 원전으로 걷는 순례를 계속하였다. 원전이 있는 고리, 월성, 울진, 영광을 기점으로 겨울방학과 여름방학 동안에 빠지지 않고 걸었다. 성원기 교수가 걷는다는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자 같이 걷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원기 교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라는 이름의 네이버 밴드(band)를 만들어 탈핵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순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람살라에 오기 전에 나는 성원기 교수가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도를 일주하고, 배를 타고 목포로 건너가 영광 원자력발전소에서부터 북쪽으로 계속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주도를 걸을 때에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가 성원기 교수 일행과 함께 하루를 걸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가운데 모자를 쓰지 않은 분이 주교님이다. 주교님 왼쪽에 성원기 교수가 서 있다.

 

 

그러한 성원기 교수가 내일 판문점에서 올 겨울방학 순례를 마친다는 소식을 병산이 오늘 들은 것이다. 언젠가 병산에게 물어보니, 병산은 성원기 교수가 걷는 것을 보고서 “아하, 걷기만 해도 환경 운동이 되는구나”라고 깨달았으며 서울에서 로마까지 걷는 21세기의 새로운 실크로드 순례를 착안했다고 한다.

 

21세기 실크로드는 원래 11,000 km를 걸을 목표였으나 중간에 9,000 km로 수정하였다. 병산은 2017년 5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다람살라에 도착한 현재까지 5,000 km를 걸었다. 나중에 내가 성원기 교수에게 물어보니, 그는 2013년 여름 방학부터 2019년 2월 말까지 모두 6,660 km를 걸었다고 한다. 내가 볼 때에 병산이나 성원기 교수나 대한민국을 빛내는 21세기의 돈키호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병산과 성원기 교수는 순례길을 걷는다는 점은 같은데 차이점도 있다. 병산은 나라밖을 걷고, 성원기 교수는 나라 안을 걷는다. 불교 신자인 병산은 가능하면 절에서 절로 걷는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인 성원기 교수는 성당에서 성당으로 걷는다. 잘 걷는 기독교 신자가 나타나 탈핵 깃발을 들고 교회당에서 교회당으로 걸으면 종교 간 구색이 맞을 텐데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아쉽다.

 

점심 식사 뒤에 우리는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별다른 일정 없이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인터넷으로 달라이 라마에 관하여 자세히 검색해 보았다.

 

1935년 7월 6일 티베트 암도(Amdo) 지방의 탁체르(Taktser)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가 아들을 낳아 라모 ‘돈둡(Lhamo Thondup)’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탁체르는 ‘포효하는 사자’라는 뜻을 가진 작은 마을로서 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탁체르는 가난한 이주민들이 만든 2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이었다.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죽자 티베트 정부에서는 환생자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만들었다. 라모 돈둡이 세 살 되었을 무렵 수색대가 쿰붐(Kumbum) 사원으로 왔다. 여러 가지 징후가 수색대를 그 곳으로 이끌었다. 징후 가운데 하나는 13대 달라이 라마의 시신이 원래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머리가 북동쪽으로 틀어져 있던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섭정을 맡았던 스님께서 예언을 보았다. 스님이 ‘라모 라초’라는 성스러운 호수의 물속을 들여다보니 아(Ah), 까(Ka), 마(Ma)라는 티베트 글자가 떠오르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이어서 길이 산중턱으로 이르고 터키석과 금으로 만들어진 지붕을 가진 3층짜리 사원의 이미지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홈통 모양이 특이한 작은 집을 보았다. 스님은 아(Ah)라는 글자가 티베트의 북동쪽 지방인 암도(Amdo)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수색대를 보냈다.

 

쿰붐 사원에 도착했을 때 수색대는 그들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글자 까(Ka)는 쿰붐에 있는 청록색 지붕의 3층짜리 사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이한 홈통을 가진 집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주변 마을부터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라모 돈둡 부모님 집 지붕 위의 울퉁불퉁하고 비틀린 향나무를 보았을 때, 수색대는 환생자가 그곳에 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수색대는 방문의 목적을 밝히지 않고, 그 집에서 하룻밤 묵기를 청했다.

 

수색대의 대표인 케상 린포체는 라싸에 있는 세라 사원의 주지였지만 하인인 척하면서 다른 사람이 대표로 행세하기로 했다. 라모 돈둡은 케상 린포체를 보자마자 무릎 위로 올라가 그가 가지고 있는 염주를 달라고 했다. 케상 린포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맞히면 주겠다고 하자 라모 돈둡은 사투리로 “세라 사원의 주지”라고 말했다. 수색대는 이 아이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라고 믿었다.

 

수색대는 다음날 떠났고, 얼마 뒤 정식 대표단을 이끌고 다시 마을로 찾아왔다. 그들은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 그리고 유품과 비슷한 몇 개의 다른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어린 아이는 "이건 내 꺼야. 이건 내 꺼야" 라고 말하며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을 정확하게 알아내었다. 수색대는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았다고 확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