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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청량산을 가는 까닭

청량산, 조선 유학의 성지로 새롭게 평가를 받아야
[솔바람과 송순주 9]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여러분은 청량산을 아시는가?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지만, 대규모 위락시설이나 숙박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이 아주 크거나 높은 것도 아니다. 그 산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깊은 두메산골로 알려진 경북 봉화에 있다. 봉화하면 춘양목으로 유명한데, 그만큼 산이 깊어서 우리나라 전래의 소나무 가운데 최고의 것들이 남아있는 셈이고. 그만큼 깊은 두메산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청량산을 아신다면 당신은 산 또은 절과 그 분위기, 역사를 웬만큼 좋아하는 분이 아닐 수가 없다 . ​

 

최근 이 청량산이 뉴스를 탔다. 바로 지난 달 중순 경북 봉화군이 지난 5월부터 청량산 안에 있는 김생암지라는 한 굴을 발굴조사했는데, 230㎡에 달하는 이 굴 안, 자연암반을 굴착해 만들어진 바위그늘 아래에 인공축대와 기단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이 김생암지는 신라말의 명필 김생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인데 과연 그 안에서 토기조각, 자기조각 기와조각 등 고려시대 전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고, 특히 ‘淸凉 (청량)’과 ‘山寺 (산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金生寺 (김생사)’로 추정되는 기와조각이 발굴됨으로써 이 산의 전설을 기록한 조선시대 주세붕의 《유청량산록 (遊淸凉山錄)》이나 신후재의 《유청량산기(遊淸凉山記)》 등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했음을 밝혀준다는 발표였다. ​

 

사실 이 청량산에 잇는 청량사는 우리나라 절 가운데 산사음악회를 가장 초기에 시작한 절로 유명하다. 그래서 가보고 싶었는데 필자는 한 십 년 전에 회사 동료들과 함께 이 산을 찾았었다.

 

 

그 때 아침 7시에는 무조건 출발한다고 해 부지런히 모이는 장소에 갔는데 버스가 출발한 것은 30분이나 지나서였고, 중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영주에서 봉화방면으로 가야하는데 안동 쪽으로 잘못 가다가 되돌아오기도 했고 봉화군내에서도 곧바로 길을 찾지 못해 가끔씩 버스를 세우고 길을 물어야 했다. 결국은 서울을 출발한 지 4시간 만에야 청량산이란 데를 도착할 수 있었으니, 아 명산은 이처럼 우리들 세속에 물든 사람들에겐 접근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게 도착한 청량산, 버스 차창 밖으로 간간히 맑은 계곡물과 멋진 암벽들이 보이긴 했으나 입구는 아직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오른쪽으로 낙동강의 작은 지류에 해당하는 조그만 계류가 내려오고 있는데 그 계류 옆을 따라 새로 만든 포장길이 죽 이어진다. 그 땐 봄철 가뭄기여서 물도 별로 없었다. 사람들의 불만이 시작됐다. “뭐 이런 데를 사람들이 그리 좋다고 오자는 것일까?” 이런 불평을 하는 사이에 버스는 곧바로 절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길 옆 등산로입구에 우리를 내려준다. 일행 가운데 누구는 벌써 “야! 이거 배고파 못하겠다. 어디 뭐 좀 먹고 갔으면”라고 엄살이다.

 

비탈을 따라 산을 올라가는 과정은 여느 산이나 다를 것이 없다. 아직 이 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모퉁이 두서너 개를 돌고 도는데 오른쪽 산비탈에 굴이 보인다. 여기가 앞에 뭐가 많이 나왔다는 김생암지, 곧 김생이 머물던 암자가 있었다는 곳이다. 그 속을 조사해 보니 그 때 기록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나온 셈이다.

 

그래도 길은 더 가야 한다. 앞 사람의 뒤꿈치만 보며 가파른 길을 따라서 또 한참 땀을 흘리며 올라가니 멀리 탑 같은 것이 보인다. “아 이제 다 온 모양이구나.” 이마에 솟는 땀을 씻을 겨를도 없이 우리들은 절의 건물들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 커다란 종루 앞에 있는 샘물을 퍼 마시며 비로소 절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보는 청량산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눈 앞 양쪽에서부터 시작해 등 뒤까지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누가 말해준대로 연꽃의 봉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절은 가파른 비탈을 따라 군데군데 계단식으로 만들어 전각과 종루를 세웠다. 전각 앞에는 멋진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앞쪽으로 나무판자로 대를 만들어 낸 곳에 오층으로 된 흰 사리탑이 서 있다.

 

 

탑 앞의 소나무는 족히 한 이백년은 되었을 것이다. 이 소나무에 사연이 있다. 근처 마을에 있던 뿔이 세 개 달린 한 황소가 하도 사나워서 농사일에는 쓸 수가 없었는데, 이 산속으로 오게 하자 그 센 힘으로 돌과 재목들을 부지런히 날라 암자를 잘 짓게 했다고 하며, 끝내 힘이 부쳐 죽어, 이 자리에 묻으니 이번엔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되어 다시 나왔다고 한다. 그 황소는 이 불전에서 천 년을 산다는 소나무로 다시 태어난 것이리라. 불교에서 나를 찾는 수행과정을 소를 찾는데 비유하고 있는데. 저기 서 있는 저 ‘삼지우송(三枝牛松)’이 혹시 우리 자신의 ‘진여(眞如 참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 소나무 뒤의 전각에는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큰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글씨가 획이 굵고 힘차다. 이 절의 스님이 말씀하시길 공민왕의 글씨란다. 아니 공민왕이라면 고려 말의 임금인데, 그 분이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랬단다. 공민왕 10년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안동지방으로 피신했는데, 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이 청량산에 산성을 쌓고 산 속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유리보전’은 불교신도들은 잘 아는 대로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곧 약사불을 모시는 전각이며, 약사불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면서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부처이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다보면 늘 그렇고 그런 불교이야기, 불교미술이야기만 줄줄줄 나온다. 말하자면 이 유리보전의 주불 약사여래는 주불로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종이로 만든 부처이고 왼쪽의 지장보살은 특이하게 반가부좌를 하고 있고, 오른 쪽 문수보살도 종이로 만들었고.... 하며 얘기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런 얘기는 접어두자.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이로 만들었건 나무로 만들었건 개금을 해서 겉으로 보면 다 번쩍이는 황금불이다.

 

(일본의 교토에 있는 일본 국보 제1호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은 표면에 금을 입히지 않고 나무의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재료의 차이를 그대로 느낌으로 받게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단청도 진하게 입혀서 나무의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불상도 석불이 아니면 지불이든 목불이든 차이가 없다. 이 점은 아쉬운 면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불교미술적인 지식의 나열보다는 절이건, 산이건, 부처를 보건, 어느 곳 어떤 것을 보던, 어떤 느낌을 받고 어떤 감화를 받느냐에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라면 청량산은 대단한 감화를 받는 곳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천태종 구인사가 연화봉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이곳 청량사가 있는 이 지형에 견줄 바가 아니다.

 

참으로 연꽃잎으로 포근히 쌓인 이 절에 서서 앞을 둘러싼 산자락과 주위의 높은 암벽, 절벽들을 보노라면 과연 우리가 연꽃 안에 들어와 모든 걱정을 잠시라도 덜고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곳이란 느낌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중교를 떠나서 이러한 느낌, 축복을 받는다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그런 특별한 느낌은 이 절에서 비빔밥으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서 비스듬히 돌아 응진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일종의 전망대인 어풍대(御風臺)에서 가장 잘 받을 수 있다. 어풍대에서 바라보면 연꽃잎인 청량산 봉우리들과 꽃술에 해당하는 청량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다. 거기서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꼭 연꽃으로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870m여서 그리 높지는 않으나 아담하고 단정한 모양을 곧은 선비의 모습으로 생각한 사람이 곧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소수서원을 연 주세붕이다. 일찍이 그는 청량산을 보고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기만 하여 정녕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다른 느낌은 또 어떠랴.

 

청량산에는 봉우리가 많은데 흔히 육육봉이 있다고 한다. 육육이라고 해서 36개의 봉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6개 더하기 6개, 곧 12개가 있다는 뜻이다. 가장 높은 장인봉(丈人峰, 870.4m)을 필두로 선학봉(仙鶴峰, 821m), 자란봉(紫鸞峰, 796m) 자소봉(紫宵峰=보살봉, 845m), 탁필봉(卓筆峰, 620m), 연적봉(硯滴峰, 850m), 연화봉(蓮花峰), 향로봉(香爐峰), 경일봉(擎日峰, 750m), 금탑봉(金塔峰, 620m), 축융봉(祝融峰, 845.2m) 등 12봉우리가 늘어서 있으면서 이 산을 명산으로 만들고 있다. 육육봉을 연결해 주는 것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놓인 구름다리이다. 육육봉이란 명명법은 청량산을 명산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퇴계 이황이 붙인 이름이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사실 청량산은 퇴계의 집안 산이나 다름이 없다. 퇴계는 이 산을 ‘우리집안 산[吾家山]’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까닭이 있다. 퇴계의 집안은 진성(眞城) 이씨(李氏), 원래 청송 진보 쪽에서 살다가 고려 말에 이 청량산에서 40여리 떨어진 안동으로 이사 왔다. 이때에 퇴계의 5대조인 자수(子脩)라는 분이 고려 말에 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지면서 이 청량산을 나라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퇴계가 이것을 집안의 산이라고 한 것은 보다 더 현실적이다.

 

퇴계가 주세붕의 《청량산록》에 쓴 발문을 보면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에서 동북쪽으로 수십 리 거리에 있다. 나의 고장은 그 거리의 반쯤 된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를 것 같으면 5시가 되기 전에 산 중턱에 다다를 수 있다. 비록 지경은 다른 고을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안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봇짐을 메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해서 늘 자기 집같이 들렀다는 뜻으로 썼다.

 

여기서 표현을 잘 보면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라는 것이 나온다. 그 부형을 대표하는 분이 퇴계의 삼촌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다. 송재는 진성이씨 집안에서 첫 번째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으로서. 호조참판과 형조참판 등을 지낸 분이다. 이우는 17살 때에 청량산 안중사에 가서 독서하고 학문을 이루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 형에 해당하는 분이 퇴계의 4번째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다. 퇴계의 아버지 이식(李埴)은 6남1녀를 낳았는데, 4번째가 온계 이해이며, 여섯 번째 막내가 퇴계 이황이다. 6남 가운데 넷째인 해와 막내인 퇴계가 가장 총명했다. 온계 해가 일곱 살, 퇴계 황이 두 살 때에 아버지 이식이 돌아가셨다.

 

천둥 벌거숭이같은 아이들은 자연히 숙부인 송재 이우의 몫이 되었다. 삼촌은 진주목사 등 외지를 다니면서도 조카들을 불러와 공부를 시켰다. 1513년 봄 삼촌은 열여덟 살이 된 조카 해를 청량산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이때에 자신의 사위인 조효연과 오언의 두 사람도 함께 보내며 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열 한수의 시를 지어주었다.

 

讀書人道若遊山 사람들은 말하지, 독서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아서

深淺優游信往還 깊고 얕은 곳을 여유 있게 마음대로 오간다고.

況是淸凉幽絶處 하물며 청량산 그윽하고 빼어난 그 곳은

我曾螢雪十年間 내 일찍이 10년간 형설의 공을 이룬 곳임에랴?

 

이우, '청량산으로 독서하러 가는 조씨 오씨 두 사위와 조카 해를 보내며'

送曺吳兩郞與瀣輩讀書淸凉山, 《송재집》

 

2년 뒤 봄에 온계 해는 연로하신 삼촌을 모시고 청량산을 다녀왔다. 이때에 퇴계가 청량산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퇴계로서도 형이 공부를 하고 있던 청량산을 자주 다녔을 것이다. 그러기에 헤아릴 수 없이 다녔다는 표현을 했을 것이다. 퇴계의 형 온계는 퇴계보다 6년 앞서서 진사와 문과시험을 통과해 벼슬길에 나섰고 퇴계는 그러한 형을 본받아 형제의 벼슬이 나란히 올라갔다.

 

그러나 형 온계는 대사헌, 대사간을 거쳐 황해 충청 감사를 지내고(충청감사 때 퇴계는 단양군수로 나갔다.) 한성부윤(현재로 보면 서울시 부시장)을 하다가 간신 윤원형과 이기의 무리에 의해 억울한 옥사에 몰려 문초를 당하고 귀양을 가던 중에 55살의 나이로 숨졌다. 퇴계는 그런 형님과는 달리 세상에 나가는 것을 꺼리고 학문에 뜻이 높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형님이 변을 당하는 것을 더욱 계기로 삼아 고향에 물러가 학문에만 진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청량산은 진성 이씨 가문의 3대 인재인 송재 이우와 온계 이해, 퇴계 이황이 모두 공부를 해서 이름을 얻은 곳이다. 특히 퇴계는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할 때에도 청량산은 늘 마음의 휴식처이자 단련장이었다. 그는 이 산을 `혼자 가서 몰래 보고 혼자만의 가슴 속에 가만히 묻어두고 싶은 산` 이라고 표현하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수시로 찾아갔다. 주세붕의 《청량산록(淸凉山錄)》에 발문(跋文)을 써준 것도 이 무렵이다.

 

특히 55살이 된 1555년 11월에는 청량산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십일월입청량산(十一月入淸凉山)'이란 제목의 시 40구(句)를 읊었다. 청량산인이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이다. 퇴계는 청량산에 대해서 모두 55편의 시와 발문, 기문을 남겼다. 그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으뜸가는 시인인 이규보가 이 청량산에 미쳐 살았다. 이규보는 시, 술, 거문고를 즐기는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자칭하면서 호탕하고 때로는 기발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는데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청량산에 들어와 시부(詩賦)를 일삼으며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부르며 살았다.

 

또 공민왕의 전설이 곳곳에 어려 있고 유학자인 주세붕이 열 두 봉우리 이름을 새로 붙이는 등 유학자들이 대거 이 산을 찾아 산수를 즐겼다. 이런 관계로 청량산은 산지(山誌)가 3종이 전해오며 산을 둘러본 학자들이 남긴 유산기(遊山記)도 100여 편이 전해오고 청량산을 예찬한 시조도 1천여 수에 이른다. 국내의 어떤 명산도 산지가 《오가산지》, 《청량산지》 등 3종이나 나온 경우가 없다고 한다. 산지는 산의 역사와 문화, 유적, 지명과 유래 등을 모은 책으로 개인들이 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 승려가 기록한 북한산 산지가 전해질 뿐 백두산, 지리산, 묘향산 등 국내 어떤 명산도 청량산처럼 산지가 많이 전해오는 경우는 드물다. 또 100편 이상의 유산기는 금강산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양이다. 그처럼 청량산은 골과 길, 암벽과 굴, 높은 대와 봉우리, 절과 암자마다 전설과 설화, 시와 시조가 없는 곳이 없다. 그만큼 이 산은 명산이고, 특히 선조들의 사랑을 받은 곳임을 이곳에 오면 알 수 있다.

 

제자들을 통해 청량산 소식을 듣던 퇴계는 예순네 살 되던 1564년 4월 제자들을 이끌고 청량산을 유람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황준량을 제외한 이황의 핵심적인 제자들이 이 산행에 모두 참여하였다. 퇴계의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일종의 배움(講學)의 연장이었는데, 퇴계는 주자가 장식과 남악 형산을 유람하며 창수시(唱酬詩)를 남긴 예를 따라 산에 오르는 것을 독서에 견주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물론 이 시는 예전 자신을 가르쳐 준 삼촌 송재 이우가 자기 형 해에게 써준 11편의 시 첫머리에

 

讀書人道若遊山 사람들은 말하지, 독서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아서

深淺優游信往還 깊고 얕은 곳을 여유 있게 마음대로 오간다고.

 

라고 한 것에 대한 50년 만의 대답이기도 하다.

 

讀書人說遊山似 책을 읽는 사람들이 산을 유람한 것을 말하더니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책 읽는 것과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을 다할 때도 하층에서 시작하는 법

淺深得處摠由渠 깊이를 얻는 것은 모두가 자기에게 달린 것.

坐看雲起因知妙 조용히 앉아 일어나는 구름을 보고 오묘함을 알고

行到源頭始覺初 근원을 찾아가면 사물의 시초를 알게 된다지

絶頂高尋勉公等 그대들에게 높은 절정을 찾으라 권면하지만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하여 중도에 그만 둔 내가 부끄럽구나

 

이황, <책을 읽는 것은 산에 노니는 것과 같다(讀書如遊山)>, 《퇴계집》​

 

퇴계는 어느 자리에서 요산요수(樂山樂水)에 대해서 말하기를​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말은 산이 곧 어짐이고 물이 곧 슬기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과 산수의 성(性)이 같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어진 이는 산과 비슷하기 때문에 산을 좋아하고, 슬기 있는 사람은 물과 비슷하기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비슷하다는 것은 어진 이와 슬기 있는 이의 기상과 의사를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떤 형상을 통하여 근본을 구하고 본보기의 극치를 삼으려는 것이지, 산과 물에서 어짐과 슬기를 구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내 마음에 어짐과 슬기의 내용이 가득차서 밖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요산요수」는 간절히 구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인간의 본성을 수양하는 면에서 명쾌하게 정의한 것이다. 참으로 책을 읽는 것은 산에 노니는 것과 같은 것 같다.

 

약 270년 후인 순조 32년 유림에서는 송재 이우가 먼저 공부하고 조카 온계 이해와 퇴계 이황, 사위 조효연 등이 공부하던 곳에 집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이름을 청량정사라고 하여 지금껏 전해온다. 퇴계는 도산에서 이곳 청량산에 이르는 낙동강의 길목을 따라 9군데의 명소를 도산구곡으로 명명하고 각각에 대해 시를 남긴다.

 

청량산관리사무소의 학예연구사 정민호 씨는 "중국 무이산에 무이정사와 무이구곡이 있듯이 청량산에 청량정사와 도산구곡이 있다는 것은 퇴계 이황이 청량산을 조선의 무이산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주자가 살았던 무이산(중국 복건성)이 유교의 성지가 된 것처럼 청량산은 이제 조선 유학의 성지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청량산은 불교의 성지이지만 동시에 유학의 성지이기도 한 것이다.

 

청량사와 청량산을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어풍대에서 응진암으로 가는 길은 깎아지른 천애의 절벽이다.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 길옆에는 추락주의라는 푯말이 서 있는데,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득하다. 응진암 머리 위는 절벽으로서, 그 위에 부처 같은 바윗돌 하나가 얹혀 있고 거기에 재미있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한 스님이 있어 절터를 찾아 온 나라를 헤매어 다니다가 청량산 금탑봉 중턱에 아래에 명당 절터를 발견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의 걱정은 절터 뒤 바위 위에 건덜건덜 흔들리는 바위가 있어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힘이 세기로 유명한 이 스님이 올라가서 절벽 밑으로 바위를 밀어 굴려 버리고 다음날 절터에 가보았더니 분명 어제 밀어 굴려버린 바위가 제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닌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마니를 깔고 돌을 끌어올린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도깨비의 짓이라 하였지만 스님은 절을 세우지 말라는 부처님 계시로 생각하고 절을 짓지 않았다. 이곳에 의상대사가 건들바위가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고 지은 절이 응진전이라는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건들바위 또는 동풍석(動風石)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응진(應眞)이란 '아라한', 흔히 줄여서 '나한'이라고 하는 부처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응진전(應眞殿)이란 부처님의 제자를 모신 곳이고 옛날에는 나한전이라고 불리었다. 응진전에는 16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이 나한상 하나하나는 노국 공주와 시녀들이 깎았다고 하며 그 중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형상한 상도 있다. 그런 청량산을 하루에 아쉽게 보고 내려와야 했다.

 

 

얼마 전에 집안 행사 관계로 안동 도산면 온혜리에 왔다가 이 청량산을 아침 일찍 지난 적이 있는데 청량산 입구에 예전에 없던 숙박시설과 음식점 등이 많이 생겼다. 이제 가을이 되면 이곳에 많은 관광객, 관람객들이 올 것이다. 가을에 청량산은 단풍이 죽여준다고 한다. 그 단풍 속에서 산사음악회가 시작돼 청량산 산사음악회는 산사음악회의 원조라고 하겠다. 이 가을에 다시 청량산에 와서 봄에 못 본 진정한 산의 속살과 내음, 퇴계와 여러 문인들이 남긴 체취와 가르침을 함께 보고 느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