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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3·1만세운동이 낳은 큰 잡지 《개벽》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1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의 사상계(界)는 3·1운동을 기회 삼아 일대(一大) 전환을 하였다.(가운데 줄임) 당국이 매양 숫자를 거(擧)하여 조선의 발전을 과장하나, 그것이 전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상의 발전이요 이익이다. 조선사람의 생계는 반비례로 궁경(窮境)으로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숫자의 보고는 대부분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적 발전을 지칭함이요, 조선인의 생산범위는 도리어 점차 수축됨을 따라서 생활정도가 극도로 저락(低落)하여 전(全) 조선은 정(正)히 아귀굴(餓鬼窟)로 화하였다.”

 

이는 1924년 펴낸 《개벽(開闢)》 3월호의 이민(李民)이 쓴 “사상(思想)의 추세(趨勢)와 운동(運動)의 방향(方向)”이란 논문 일부입니다. 논문은 조선 사상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당시의 심각한 경제사정과 일제의 식민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자(7월호)로 창간된,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종합잡지였지요. 이 논문에서 보다시피 《개벽》은 우리 겨레의 뜻을 가장 충실히 대변했고, 언제나 일제와 맞서 겨레의 자존심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따라서 《개벽》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가운데 일제의 탄압을 가장 많이 받았던 잡지로 꼽힙니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판매금지를 당했는데, 그래서 〈사고(謝告 : 사과하는 광고)〉라는 것을 잡지 맨 앞에 싣고 문제된 부분을 삭제하여 〈호외(號外)〉로 발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호외 형식으로의 발행조차도 트집을 잡아 압류처분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고초를 겪고서 표지도 흰 바탕에 제호와 〈임시호〉라는 이름을 붙여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어려움 속에서 이어오던 《개벽》 1926년 6월호에는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여지없이 검열에 걸려 《개벽》은 다시 판매 금지당하고 압수되었지요. 그 뒤 1935년 3월에 겨우 4호를 내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진 폐간했습니다. 그러다가 광복 뒤 1946년 1월 속간되어 1949년 3월까지 9호를 내고는 영영 사라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