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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오월 속에 있다니까요

오월 이맘때쯤이면 늘 피천득 선생님 생각이...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47]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현대인들은 마음이 바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수필이건 시이건 소설이건 빨리 결론이 뭔가, 뭐가 가장 중요한가를 파악하는 능력이 우선시 된다. 새잎이 나기 시작하는 4월에는 ‘사월은 잔인한 달’이란 어느 외국 시인의 글귀만을 인용하는 것이 그것이고 5월이 되면 영문학자인 피천득 선생님의 <오월>이란 수필을 들먹거리면서도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라는 구절만을 반복해서 듣고 인용하는 것으로 오월을 보낸다.

 

그런데 오월을 신록이라는 개념으로만 보면 오월의 진정한 맛을 모르듯이 피천득 선생님의 <오월>을 첫 구절에만 머물고 더는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면 그 수필과 수필에 담긴 진정한 맛을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된다. 그만큼 우리의 삶을 겉핥기식으로 마구 보내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 <오월>이란 수필을 조금 더 읽어보자 ​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오월은 결국 신록인데, 그 신록이 이처럼 싱그럽고 섬세하고 보드라운 감성의 향연임을 피천득은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읽으면 왜 오월이 스 한 살이란 나이로 표현한 것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런데 피천득이 말한 오월은 스물한 살 때의 애틋한 경험이다. 그다음 글에 나온다.​

 

스물한 살의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우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의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이 부분을 읽으니 저자는 스물한 살 청년일 때의 오월 어느 날에 아마도 좋아하던 여성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애정의 고통을 맛보다가 불현듯 밤차를 타고 어느 해변까지 달려가서 사람이 아직 찾지 않은 피서지의 쓸쓸한 풍경을 본다. 그러다가 파도가 쓸고 가는 모래 위에 마음의 상처를 쓰고서는 바닷물이 씻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고통의 마음을 극복하고 일어선다.

 

그러므로 <오월>은 피천득 선생님의 젊은 시절 연애극복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가슴 쥐어짤 청춘의 아픔, 자기고백인 것이다. 그것을 첫 줄만을 듣고 끝낸다면 우리는 삶의 깊은 맛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될 수 있다. ​

 

그러나 그런 깊은 사정을 모르더라도 오월은 20대를 맞는 젊은이들의 청신한 얼굴의 아름다움이다. 물만 묻혀도 윤기가 빛나는 피부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들, 미래를 기다리는 맑은 눈동자들, 무언가 많은 감성을 터트리고 싶은 붉은 입술들, 이런 모든 젊음의 아름다움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오월이고, 여기에 피천득 선생님의 이 수필이 그러한 연역과 연상의 촉매가 되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다음 주 25일이면 피천득 선생님이 우리를 떠난 지도 벌써 13년이나 된다. 필자가 말끝마다 선생님이란 호칭을 빼지 않는 것은 1972년 봄 신입생 때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서 영어수필 강의로 처음으로 선생님을 뵈었고 그다음 해엔 영시 강의를 들었는데 그 겨울 이후에 따님을 본다고 미국을 가신 뒤로 다시 뵙지를 못했던, 요즈음에는 쓰기가 다소 어색한 단어로 말하면, 필자의 은사이셨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나와 쓸데없이 잘난 체하고 살던 2007년 5월 25일 밤늦게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새벽까지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을 썼었다. 그러기에 오월이 중순을 지나 하순으로 접어들면 선생님 생각이 자꾸 난다.

 

 

우리 영어과 교수님 가운데 언어학과 영문법을 연구하신 문용 선생님이 계시는데 문 선생님도 1971년에 처음 교수로 부임해서는 피천득 선생님을 매일 옆에서 뵈었고 그때 자작시 몇 편으로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서울대를 퇴직하고 명예교수로 있던 2004년에 서울대에서 발행한 《다섯수레의 책》 속에 밝힌 적이 있다. 이 글에서 문용 선생님은 피천득을 이렇게 정의한다.

 

피 선생을 사람들은 그가 쓴 글을 예로 들면서 소녀같이 순수한 분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순수한 소녀로 치면야 두메산골의 스무 살이 안 된 처녀의 순수성에 비할까? 몸집이 작으신 피 선생을 거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런 소녀 같은 순수성과 날카롭게 번득이는 지성의 공존이다.

 

피천득 선생님은 올해가 탄생 110돌이다. 문용 선생님은 1930년생이시니까 올해 90이시다. 1972년 당시 필자는 스무 살(정확히는 만 19살)이었다. 인생의 오월이었던 것이다. 피천득 선생님은 하늘나라로 가시고 문용 선생님은 이제 인생의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고 계실 것이고 필자도 문용 선생님의 전매특허 같았던 백발을 반 이상 따라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오월이 반 이상 지나갔다. 아니 아직도 상당히 많이 남은 것인가? 그렇지만 필자는 숫자건 날자건 더는 세지 않기로 했다. 선생님의 글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신록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